주일 낮 설교
아버지의 마음 (누가복음 15 : 18-24)
김은미 댓글 0건 조회 7,230회 작성일 2014-09-16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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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014.8.3.주일낮예배

아버지의 마음  누가복음 15 :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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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도 가장 큰 감동을 주는 비유입니다. 흔히 탕자 비유로, 집나간 자식에게 초점을 맞출 수도 있습니다만, 성경의 본래 의도는 "아버지 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탕자는 아버지 재산 중에 자기 몫을 달라고 요구하고는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갔습니다. 먼 나라가 어디입니까? 아버지 사랑과는 거리가 먼 나라, 평화가 없는 나라, 신비해 보이고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자기가 파괴되는 나라입니다. 탕자는 이렇게 먼 나라로 갔다가 모든 걸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아버지를 떠나온 것이 죄임을 깨닫고는 아들이 아닌 품꾼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돌아오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버지의 위로를 받고, 아버지 품에서 잃어버린 모든 것이 회복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인내하며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기다리는 아버지는 아들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는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현재만 보고 그 자녀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탕자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재 아들의 죄악이 아니라, 미래 회개하고 돌아올 아들을 생각하며 기다렸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20)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는지 아버지는 거리가 먼데도 아들을 먼저 알아본 것입니다.

거리가 멀다는 말은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탕자가 아버지를 멀리 떠나 있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이 돌아올 희망이 보이지 않는 간격과 거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이 집으로 돌아온다는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직 그가 멀리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알고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먼저 보고 달려가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아들을 안아준 것입니다. 그 아들에게 용기를 주고, 환영해주고, 데리고 들어와 잔치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돌아온 아들 때문에 기쁨에 겨워 잔치하는 아버지를 보세요. 세상 문제가 다 해결되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잃은 돈을 다 찾아 기뻐하는 것도, 집안 사정이 좋아져서 기뻐하는 것도, 건강이 온전해져서 기뻐하는 것도 아닙니다.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먼저 달려와 안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아버지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기다림이 있기에 우리가 그 품에 돌아갈 수 있고,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것을 다 용납하시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러나 회개보다 먼저 있는 것은 ‘’용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언제나 사랑의 특징은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아버지가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아예 집 떠날 때부터 이미 용서한 것입니다. 돌아와서 용서한 것이 아니고 집나갈 때부터 용서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 여기서 측은히라는 말은 함께 느낀다라는 말입니다. 아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아버지, 아들의 실패를 내 실패로 받아주고, 아들의 연약함을 함께 아파하고, 아들의 실수를 내 실수로 여기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용서와 치유,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품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고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도, 어떤 사람도 용납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담을 찾으러 에덴동산에 오신 하나님은 때가 되자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창기, 세리, 어부, 사마리아 여인 등 누구를 막론하고 다 사랑해 주셨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든지 다 찾아가셔서 용납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치유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아 있는 유일한 근거는 아버지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자유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을 공부나 성적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성공했다고, 의인이라고 받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 자식의 능력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 관계로 만나는 것입니다.

집 나간 아들의 행위나 삶은, 틀림없는 탕자입니다. 그는 죄인입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이방인이 되어버린 자입니다. 그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돼지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회복이 불가능한 이방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가장 불결하게 생각하는 짐승입니다. 그가 돼지를 칠 뿐만 아니라,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더 이상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탕자 중에 탕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탕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여전히 아들로 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분을 회복시켜 줍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2-23)고 합니다. 여기서 좋은 옷이나 가락지, 신발, 살진 송아지 등은 아들 신분으로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신분뿐만 아니라 아들의 권세도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둘째 아들이 잘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행위가 옳아서, 의로워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공했기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그래서 신분도 권세도 모든 잃어버린 것을 다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복음입니다. 그 복음 때문에 우리는 당당한 하나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고,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빌레몬서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어느 날 오네시모는 주인이 아끼는 물건을 훔쳐 로마로 도망합니다. 로마에서 또 다른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는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고,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당시 노예법으로 주인은 노예가 잘못하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 좋은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사랑으로 받아주었습니다. 결국 오네시모는 하나님의 자녀로, 복음의 증인으로 살다가, 95년 로마 황제 박해 때 순교 반열에 서게 되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본질과 가치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과 권세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깨어진 삶이 회복됩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우리 사명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무쪼록 죄인을 의인으로 회복시키시고, 절망을 희망으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받고, 나아가 아버지의 마음을 나누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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