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 희망이다 (요한복음 11 : 25-27) 김은미 댓글 0건 조회 7,705회 작성일 2014-04-29 11:23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2014.4.20.주일낮예배(부활주일) 부활이 희망이다 요한복음 11 : 25~-27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부활은 희망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에는 사후 소망의 길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요, 지금 내 모습이 영원한 내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짧은 이별에 불과합니다. 비록 사랑하는 사람들과 잠깐 헤어지는 것이 슬프고 괴롭지만, 얼마 후면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의 희망이 되신 것입니다. 부활의 절기, 우리는 산 소망 되신 주님의 은혜가 큰 고통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도록, 이 땅에 생명과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부활이 희망이 되는 것인가? 첫째, 부활은 슬픔을 기쁨으로 회복시킨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슬픔을 기쁨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이 희망입니다. 사람은 맑은 날과 비 오는 날을 마음대로 조정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 다가오는 평안의 날과 슬픔의 날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슬픔을 보면서도 기쁨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화가 세상을 범람하지만, 결국은 사는 문화가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도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슬픔에 잠긴 마리아를 찾아오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 앞에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큰 슬픔에 잠긴 채 사흘째 되던 날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무덤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큰 슬픔과 놀라움에 울고 있는데, 그때 부활하신 주님이 “마리아야” 하고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그렇게도 슬프던 마음이 큰 기쁨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무덤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슬픔과 고통의 걸음이었지만, 이제 기쁨의 걸음, 희망의 발걸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슬픔과 낙심가운데 다 흩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락방에 숨어 두려워 떨었고, 어떤 이들은 슬픈 기색을 띠고 엠마오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을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새 힘을 주신 것입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두려움을 평안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이 희망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인생의 슬픔이 사라지고, 아픔이 치유됩니다. 인생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지금 원치 않는 일로 큰 슬픔과 고통가운데 있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마리아야’ 부르시는 주님 음성이 들려질 수 있도록, 그래서 주님 위로로 힘을 얻고 소망가운데 인내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살 소망이 끊어져 탄식하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 곁에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용기를 가지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부활의 절기, 슬픈 자를 찾아오셔서 위로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부활은 의심을 믿음으로 회복시킨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의심을 믿음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이 희망입니다. 도마는 제자들로부터 주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습니다.(요20장) 그러나 “내가 그 손에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감각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믿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것을 관찰하고 실험을 통해 확인하고, 그래서 “안다”는 말이 힘을 얻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즉 이성적 지식주의, 과학기술주의에 사로잡혀서 믿음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영적 사건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마가 그런 사람입니다. 도마는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자기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주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못 박히신 손과 발을 보여주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도마 믿음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의심의 안개가 우리 마음을 결박할 때가 있습니다. 갑작스런 불행을 당할 때, 그리고 주님의 응답이 지체될 때 주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 내 앞에 나타나도,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 현실만 다스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현실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문제에 대해 지금 당장 해답이 되지 않아도 주님의 사랑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욥은 한꺼번에 모든 재산을 잃고 열자녀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 고통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주신 자도 하나님,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절대주권 신앙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은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욥19:25-26)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시련 앞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신앙의 자리는 어떠한가? 굳건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서 있는가? 아니면 의심의 자리, 이성적 지식주의, 과학기술주의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우리도 도마처럼 믿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복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인생의 어떤 사건을 만나든지 믿음 잃어버리지 않고, 그 가운데서 일하고 계시는 주님을 믿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부활은 실패를 승리로 회복시킨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실패를 승리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이 희망입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성경은 스스로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언제 어떻게 넘어질지 모르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열심 많은 제자였습니다. 심지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내가 주를 결코 배신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체포되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제자로서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에도 갈릴리 어부로 돌아갑니다. 사명의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과 환경을 만나든지 내려가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려가면 잘 될 것 같지만, 사명을 포기하면 더 잘 살 것 같지만, 영적인 세계, 영적 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오미를 보세요. 베들레헴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서 모압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신앙을 포기하고 사명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과 두 아들을 그곳에서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깨닫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즉 신앙의 길, 사명의 길을 선택했을 때 메시야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도 사명을 포기하고 내려갔을 때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요21장)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실패 인생, 헛수고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비로소 만선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다시 일어나 초대교회 대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때로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약해질 때도 있고, 육신도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실패한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산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부활의 절기,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승리를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칩니다. 하버드대 총장이었던 푸지 박사는 “온 세상은 믿을 수 있는 신조와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찾아 헤매고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과 희망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모든 사람들이 믿음과 희망을 찾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산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희망의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부활의 절기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부활이 축복이다 (고린도전서 15 : 3-11) 14.05.20 다음글십자가 신앙을 회복하라 (누가복음 23 : 39-49)14.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