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잃어버리지 말자 (누가복음 2 : 41-51) 김은미 댓글 0건 조회 7,573회 작성일 2013-10-22 10:50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2013.9.15.주일낮예배 예수를 잃어버리지 말자 누가복음 2 : 41-51 어느 날 세 젊은이가 여행을 하면서 100층짜리 호텔 맨 꼭대기 층에 묵게 되었답니다. 저녁밥을 먹고 도시 야경을 구경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호텔방 키를 프론트에 맡기고 거리를 구경했습니다. 한참 구경을 한 후에 시간이 늦어서 호텔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난 것입니다, 고치려고 하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하기에 할 수 없이 100층까지 걸어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100층까지 올라가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슬펐던 얘기를 하며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한 친구가 어린 시절 얘기를 합니다. 가난했던 얘기, 힘들었던 시절 일을 말하는데 정말 슬펐습니다. 그래서 다 같이 참 슬프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가 첫사랑과 헤어진 얘기를 하는데, 그것도 너무 슬펐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거의 100층까지 다 올라왔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사람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얘기를 하려고 한다” 고 하면서 말문을 여는데 정말 슬펐습니다. “방 열쇠를 1층 프론트에 맡겨놓고 그냥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다보면 잊어버리는 것도 많고 잃어버리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택시를 탔을 때 젊은이들은 타자마자 스마트폰을 가지고 게임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년 여성들은 타면서부터 내릴 때까지 핸드폰을 찾다가 내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느 때는 ‘잘 잊어버리는 것이 은혜다’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냐면 별로 기분 좋은 일도 아닌데, 그것을 잊지 못해 불안해하고 슬퍼해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다 잊어버리고 다 잃어버려도, 결코 잊어서도 잃어버려서도 안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물질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을 잃을 수도 있고, 사랑이나 명예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잃어버려도, 예수만큼은 잃어버려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는 것은 이 세상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천국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고통은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도 예수를 잃어버리고 큰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따라 이스라엘 최대 명절인 유월절 행사를 했습니다. 12살 이상 된 사람들은 다 모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명절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룻길을 간 후에야 예수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결국 주님을 잃어버린 요셉과 마리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근심했다는 것입니다. 고생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요셉과 마리아처럼 고통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고통을 받았느냐? ① 정신적인 손해를 보았습니다. 요즘 같으면 아이를 잃어버리면 경찰에 신고하고, 신문 광고를 해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신문도 방송도 없으니 찾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예수를 찾느라고 고생했습니다. 정신적으로 얼마나 피곤하고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을 잃어버리면 마음속에 근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평안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② 육체적인 손해를 보았습니다. 유대나라는 지리적으로 더운 나라입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는 여행 보따리를 들고 아이를 찾느라고 많은 고생을 했을 겁니다. 몸은 땀으로 젖고 지칠대로 지쳤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잃어버리면 영혼도 힘을 잃고, 육체가 연약해지고 병이 드는 것입니다. ③ 영적인 손해를 보았습니다. 유대나라 전국에서 모여온 사람들이 유월절행사를 거행하면 많은 은혜를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받은 은혜를 다 쏟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받은 은혜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은혜는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받은 은혜를 잘 지키고 활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처럼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큰 고통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주님 전에 나와 예배드리고 있지만, 혹시 예수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이 시간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맞이하는 한 주간, 추석명절이 있습니다. 명절은 예수님을 잃어버리기가 쉬운 때입니다. 얼마나 분주하고 바쁩니까? 마음도, 생활도 분주합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든,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고통의 주인공이 되어서 한 주간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절에는 받은 은혜를 쏟지 않도록 긴장하시고, 영적으로 깨어서 기도하면서 더 큰 은혜가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인가? 그리고 잃어버린 예수님을 어디서 찾을 수 있었는가? 첫째, 예수님을 잃어버린 이유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1) 안일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안일한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본문 44절을 보면,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막연히 뒤따라오겠지 생각하고 안일하게 자기 길을 간 것입니다. 긴장하면서 예수님의 손이라도 붙잡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자기들 편한대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들이 얼마나 안일했던지, 예수를 잃어버리고도 하루를 가도록 몰랐다고 했습니다. 백리 길을 가면서도 예수를 잃어버린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들에게는 안일함을 추구하려는 마음들이 다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이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먼저 운동장에 한 사람을 세워놓고, 목표지점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눈을 가리고, 목표지점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게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백이면 백, 반듯하게 가지 않고 다 구부러지더랍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가게 했더니 그 구부러지는 선이 나중에는 원을 그리더랍니다.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사람들은 가능하면 제 자리에 있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힘든 길보다 쉬운 길을, 모험적인 삶보다 안일한 삶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하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데마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바울의 좋은 친구요 동역자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가장 어려울 때 바울의 곁을 떠난 것입니다. 바울이 순교하게 될 시간이 다가오자 그를 떠나간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있으면 박해를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피해 간 것입니다. 극심한 로마 박해를 피해 편히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데살로니가로 간 것입니다. 수고하고 십자가 지는 신앙에서 안일한 신앙으로 떠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안일하게 신앙생활 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경고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에 보면,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예수님도 안일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네가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안일한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안일함을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전쟁 중에 있습니다. 악한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안일함을 거부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대충 믿으려는 안일한 신앙생활을 할 때 마귀는 우리를 공격해 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요셉과 마리아처럼 안일함 때문에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늘 긴장하며 저 높은 곳을 향해 전진하고 또 전진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동행하는 줄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착각하는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기들과 동행하고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본문 44절을 보면,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동행중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 뒤를 따라오겠지’ ‘친척들과 함께 따라오겠지’,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착각 때문에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착각 속에서 인생을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번만큼은 대박이 날 꺼다 라는 착각.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 저 사람이 날 사랑하는 것 같다고 하는 착각. 이번주 로또복권에 당첨될 것이라는 착각. 그런데 이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 때 그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고통스럽습니까? 착각은 세월을 낭비하게 합니다. 착각은 본분을 망각하게 하고, 세상에 속아 살게 합니다. 인생을 손해보게 하고, 물질을 허비하게 합니다. 때로는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위험에 빠지게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착각은 일상생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착각 신앙’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면 신앙의 착각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면 신앙의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정복했습니다.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없습니다. 작전도 전략도 전술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 그들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여리고성을 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리고성 정복이 자신들이 이룬 승리로 착각을 합니다. 이들이 착각했다는 증거는 그 다음 성인 아이성을 치러 가는 과정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리고성을 정복한 후에 아이성을 정탐한 이스라엘은 다 올라갈 필요가 없다고 자만합니다. 그래서 이삼천명만 가도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여리고성에 비하면 아이성은 작고 사람이 적은 성이니 백성들 모두가 다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이 사람의 머릿수에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전략이나 전술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것, 그 믿음과 순종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영적 무기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승리 후에 착각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여리고성을 정복한 것으로 자만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참담한 패배를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착각하는 신앙의 결과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물었다면,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했다면,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이런 참혹한 패배는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착각하는 신앙이 되지 않기 위해 진리를 옳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알았다고 하면, 그래서 예수님을 앞세웠다고 하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사흘 동안 근심하며 고통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착각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범위 안에 있다고, 종교 행위 범위 안에 있다고, 그것이 마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고 있는 줄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나오고 예배드리기 때문에, 신앙형식에 익숙하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세군 창시자 윌리암 부스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이 시대 가장 큰 위험은 종교는 있으나 성령이 없고 교회는 있으나 예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는 철저한 착각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께 충성하며, 율법에 열심이라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선 것입니다. 그는 종교는 있었지만, 예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덮여 있던 착각의 비늘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착각의 비늘을 벗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신앙 형식에 익숙하다고 예수님이 동행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쭉정이 믿음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알곡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착각신앙은 예수님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나를 돌아보고 교만하지 말고 겸손의 영성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명절 분위기에 분주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주한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요셉과 마리아는 유월절이라는 종교행사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들은 세상 구경, 세상 얘기에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당시 유월절은 7일간 계속되는 큰 명절입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전국 각처에서 올라온 남녀노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거기에는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올라온 경건한 사람도 있었지만, 군중을 상대로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장사꾼, 약장수, 사기꾼,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끌벅적한 예루살렘 거리를 밀려다니다 보니, 시골 나사렛에서 올라온 요셉과 마리아는 여기 저기 구경하느라 정신을 빼앗긴 것입니다. 그렇게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에 아들 예수를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 주님을 잃어버리기 쉽습니까? 이처럼 세상일에 푹 빠지면, 세상 일로 분주하고 바쁠 때입니다. 그러면 왜 분주한 삶을 살아갑니까? 우선순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갖출 것 다 갖추고 살면서도 삶이 혼돈스럽고, 우리 삶의 질서가 무너지는 이유는 삶의 선과 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을 전문가 또는 장인이라고 부릅니다. 전문가, 장인이란 일의 순서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일이라도 일이 제대로 되려면 순서가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집을 짓는 데도 순서가 있습니다. 기초를 놓은 다음 기둥이요, 대들보요, 지붕이지, 이 순서가 뒤집어지면 집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루를 사는 데도 순서가 있습니다. 우선 새벽이 하루 시작이 되어야 하고, 그 새벽은 기도로 열어야 합니다. 운동도, 식사도, 출근도, 사업도, 공부도 다 기도 이후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순서가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는 일에서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여기는데서부터 우리 신앙이 바로 잡히고 성공적인 인생으로 가는 것입니다. 삭개오를 보세요. 그는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그는 돈을 인생 최고 가치로 알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우선순위가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욕을 먹더라도 돈을 벌기 위해 세리라는 직업을 놓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곤고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고, 속여서 빼앗은 것은 네 배로 갚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가치관이 변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런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신앙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선순위가 분명한 사람을 기뻐하시고 높이 세우시고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1980년대 초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가 있습니다. 불의 전차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1924년 파리 올림픽 영웅 에릭 리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그는 선교사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영국을 대표하는 육상 선수로 파리 올림픽에 출전하게 됩니다. 그의 주종목은 100미터 달리기였습니다. 드디어 여러 예선을 거쳐 결승까지 올랐고, 금메달 유망주로 전 세계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마침 결승 경기가 주일이었습니다. 그는 주일에는 출전할 수 없다고 거부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영국 황태자가 이 선수에게 찾아와서 권면합니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자, 교회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수많은 언론이 그의 신앙을 광신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조국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그 신앙이 분명합니까? 우선순위에 있어 얼마나 당당합니까?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런 신앙의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런 신앙을 욕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부심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400미터에 출전했습니다. 400미터는 주종목이 아닙니다. 그런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대회 신기록마저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운 400미터 신기록은 16년 동안이나 깨지지 않았습니다. 기자들이 몰려와 “100미터 선수가 어떻게 400미터에서 우승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그의 대답이, “100미터는 내 힘으로 뛰었고, 300미터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뛰었습니다” 그는 신앙인으로서 우선순위가 뭔지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순위가 분명한 사람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그는 절대 초라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신앙을 타협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런 그를 축복하셨고,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명절 분위기로 한창 들뜨고 분주한 때, 바로 그때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주목하고 우선순위에 있어 분명했다고 하면, 잃어버린 예수 때문에 근심하거나 고통 받지 않았을 겁니다. 여러분, 분주한 신앙을 경계하고, 예수님께 집중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선순위가 분명한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잃어버린 예수를 어디에서 찾았는가? 요셉과 마리아는 여기저기서 예수님을 찾아 헤매다가 3일이 지난 후에 찾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찾았습니까? 성전에서 찾았습니다. 46절에 보면,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9절에 보면,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집,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과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루살렘 성전은 예배 중심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 즉 모든 나라와 민족들은 이곳으로 올라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단지 예배만 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전은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삶의 기준과 판단이 세워지는 곳, 그래서 그들은 살면서도 언제나 예루살렘에 마음을 두고 살았고, 시선도 예루살렘 방향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 왕에게 도망다니면서도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교회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리스도 몸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 중심이 교회중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중심인 사람은 교회생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과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십니까? 잃어버린 은혜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까? 교회 중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잃어버린 예수는 성전에 와야 찾을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믿음, 잃어버린 은사, 잃어버린 사명, 교회 와서 찾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크레프트라는 치즈회사가 있습니다. 이 기업 설립자는 가난한 시절을 보냈지만, 신실한 믿음으로 회사를 키워 회사는 급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큰돈을 벌면서 수많은 종업원과 엄청난 매출을 누립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급성장하던 회사가 어느 날부터 점점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적자가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생산라인은 멈추기 시작했고 종업원들은 하나 둘씩 회사를 떠나고, 너무 안타깝고 어쩔 바를 모르던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를 찾아가 하소연합니다. 자초지종을 듣던 친구가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나는 솔직히 자네 회사가 망할 줄 알았네. 하나님께서 자네 회사에 축복을 쏟아 부어 주실 때, 오히려 자네는 하나님과 관계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네. 자네 회사가 급성장한 이후로 자네가 주일 한 번 제대로 지킨 적이 있나 돌이켜 보게나. 급성장한다고 좋아만했지, 그리고 바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하는 동안, 자네 회사는 멸망하는 길로 서서히 달리고 있었던 걸세” 그는 믿음의 친구 충고를 듣고 난 후 철두철미하게 회개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예배는 타협하지 말자, 교회 중심 삶을 살자, 내 수입의 절반을 하나님께 드리자’ 결단했습니다. 이렇게 결단했는데, 그 후부터 크래프트 치즈회사는 다시 회복되면서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명성을 유지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과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하면 우리 인생도 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믿음이 좋았던 때를 다시 회복하고 신앙생활 교회생활 예배생활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예수는 교회 와야 찾을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믿음, 잃어버린 사랑, 잃어버린 은사, 잃어버린 사명, 예배를 통해, 교회를 통해 찾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잃어버리지 않는 것도 예배 중심,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것도 예배 중심, 교회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교회 중심, 예배 중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을 보면 어느 기독도가 고생 끝에 천성문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믿음표를 가지고 오지 못해서 다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다보니 예수님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길은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집에다 물건을 놔두고 와도 집에 다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어제 갔던 길 궁금하면 다시 가볼 수 있습니다. 지난달에 실패했던 일, 다시 도전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길은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인생은 연습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종착점에 섰을 때, “내 곁에 예수님이 아니 계시더라! 주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하신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허망하고 불쌍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반드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핵심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주님, 영원한 생명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은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천국 문에 이를 때까지 주님 손 붙잡고 주님과 동행하며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명절도 주님을 잃어버려서 초라해지고, 근심하고, 은혜도 사명도 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승리하고, 가정에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는 명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소돔성이 주는 교훈 (창세기 19 : 23-28) 13.10.22 다음글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사도행전 26 : 24-29)13.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