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눈 (창세기 21 : 14 - 21) 김은미 댓글 0건 조회 7,431회 작성일 2013-01-28 16:29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2013.1.20.주일낮예배 믿음의 눈 창세기 21 : 14 - 21 인간의 눈에는 육안, 지안, 영안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우리는 영안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합니다. 우리 생활터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어떤 문제나 사건을 만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합니다. 이것이 영안이 열린 자의 모습입니다. 본문에는 육신의 눈은 열려 있지만 영의 눈이 닫힌 사람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사라의 몸종 하갈이라는 여인입니다. 사라는 몸종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라가 이삭을 낳으면서부터 일어납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시기해서 희롱하고 구박합니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물이 떨어져 죽게 되자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을 불러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우는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말씀하고는 하갈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눈이 열린 하갈은 옆에 있는 샘물을 발견했고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 아이에게 떠다 마시게 함으로 그 위기가 끝나게 됩니다. 하갈은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시기 전에는 우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갈이 방황한 곳은 브엘세바라는 곳으로, 일곱 개 우물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하갈의 눈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우물을 바로 옆에 두고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문제 해답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영적인 눈이 닫히면 정답을 옆에 두고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의 눈이 열리고,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갈이 우물을 발견하지 못한 구체적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분노로 눈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감정 중에 분노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인생을 살다가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감정이 조절되지 못한 분노는 많은 것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상하게 합니다. 하갈은 분노로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우물을 옆에 두고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갈은 자신이 원해서 이스마엘을 잉태한 것이 아닙니다. 사라가 억지로 아브라함 방에 떠밀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들을 낳았다고 자신과 이스마엘을 쫓아낸 것입니다. 그러니 쫓겨나면서 사라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분노가 하갈 눈을 멀게 해서 우물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바로 옆에 많은 우물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게 되었다고 통곡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주일에 3∼4일은 ‘분노’라는 감정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 화는 과거 일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 그리고 일터에서 많은 사건들을 만날 때 사람들은 쉽게 화를 내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분노의 대상이나 시점이 아니라 분노라는 감정 그 자체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분노는 우리 마음과 영을 어둡게 합니다. 우리 가슴에 분노 화산을 만듭니다. 가인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이성을 마비시키고, 상황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분노가 다스려지지 못할 때 그 사람에게는 실수와 죄악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갈은 분노로 눈이 닫혀 샘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분노는 하갈의 눈을 어둡게 했고, 그래서 자신뿐만 아니라 이스마엘을 죽음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분노 때문에 나도 죽고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을 죽게 해서는 안됩니다. 2013년, 영적인 눈이 닫혀 주님을 보지 못하고, 주님 은혜와 축복을 잃어버리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 절망으로 눈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을 때는 꿈과 희망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점차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이 찾아옵니다. 무서운 질병, 실패, 예기치 않은 사고, 노쇠, 마지막에는 죽음이란 절대 절망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하갈도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는 꿈과 희망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삭이 태어나고, 아브라함 집에서 쫓겨납니다. 브엘세바까지 왔는데 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떨어졌으니 물을 찾지 못하면 죽게 됩니다. 그러자 절망감에 사로잡혀 판단력을 잃게 되고, 바로 옆에 우물이 있는데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문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키에르 케고르는 절망이란 자기 상실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상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절망하는 것은 문제만 보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인간은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발견하는 사람은 절대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고, 믿음을 배울 수 있다면, 고난은 희망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희망 가운데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우리 앞에 홍해가 나타나고, 여리고 같은 성벽이 버티고 있고, 골리앗과 같은 적군이 있을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삶이 힘들고 지치고 곤고하십니까? 하갈처럼 광야에서 이제는 죽게 되었다고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바로 그 절망의 자리, 고통의 자리에 다가오셔서 새로운 희망의 빛을 보여주십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며 비록 견디기 힘든 고난이라 할지라도 인내하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013년, 희망의 주님으로 인해 여러분의 눈이 어두워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셋째, 불신으로 눈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열두 정탐꾼 사이에는 엄청난 시각 차이가 있었습니다. 열 사람은 절대 부정적이고, 두 사람은 절대 긍정적이었습니다. 열 두 사람이 정탐한 가나안은 똑같은 장소, 똑같은 사람, 똑같은 상황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환경에 대해 열 사람은 땅의 눈으로 보았고, 두 사람은 하늘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 원하시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불신앙은 철저히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만 불신앙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 말을 더 믿고 신뢰합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을 통해 내가 이스마엘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고 신뢰했습니다. 결국 문제를 만나자 눈이 닫혀져 곁에 있는 우물을 발견하지 못하고 통곡하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갈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서 고통을 받은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불신앙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문제 때문에 통곡하며 낙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하시고 역사하실까 기대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과 사물과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교회를 봐야 합니다. 영안으로 보지 않고는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으며,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내 곁에 해결책을 예비해 두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2013년, 삶의 모든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해석함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사모함의 은혜 (시편 81 : 10-16) 13.04.02 다음글다윗의 승리 (시편 55 : 16-23)13.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