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신앙과 윤리 (마태복음 5 : 38-48)
김은미 댓글 0건 조회 7,011회 작성일 2013-01-2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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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4.주일낮예배

신앙과 윤리

마태복음 5 : 38-48

하이데거가 쓴 <Das MAN>이라는 글에 보면 보통 인간에 관해 세 가지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①말하기를 좋아하고, ②호기심이 많으며, ③애매하게 살아가는 존재, 즉 어떤 진리나 인생관, 확고한 생의 목표 없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보통 사람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윤리관을 가져도 보통윤리, 세속적인 윤리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특별한 윤리, 신앙윤리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의 윤리는 ‘나’ 중심에서 출발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탐심으로 인해 부패된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윤리, 신앙윤리는 이타심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윤리요 신앙윤리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으로, 천국윤리, 신앙윤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인이 가져야 할 윤리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당부하신 성도 도리와 규범이 무엇인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본문 39절로 41절에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하십니다. 누가 고발해서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하십니다. 또 억지로 오리를 같이 가게 하면 십리라도 동행하라고 하십니다. 세상 윤리로 보면 이는 마치 바보처럼 사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와 같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당하면 되갚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한 대 맞았으면 너는 두 대 맞아야 된다’ 이것이 보통윤리, 세상윤리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역사는 피로 물들인 역사가 연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윤리는 악을 악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같아서는 안되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새로운 가치와 규범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윤리, 신앙윤리입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 오늘 예수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보여주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 악함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선대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영성을 본받아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베풀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날마다 선으로 악을 이기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원수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이는 세상 논리로 볼 때는 어리석은 방법입니다. 원수란 어떤 사람입니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를 미워하고, 내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사람을 원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리석은 방법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별함이 없습니다. 선인도 사랑하시고 악인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사랑 받을 때 사랑합니다. 내 자녀, 부모, 형제는 자연스럽게 사랑합니다. 이런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랑을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 자기를 희생하고 행동에 옮기는 사랑,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사랑하는 사랑, 열번 백번 똑 같은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며 믿음으로 십자가 앞에 나가기만 하면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어떤 원한이 있습니까? 미워하는 감정이나 분노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수 사랑이 어떻게 사람의 감정과 이성으로 가능합니까? 인간윤리, 세상윤리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윤리로는 가능합니다. 신앙윤리, 천국윤리로는 가능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의 영성이 회복될 수 있도록 소원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 본능과 감정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아무쪼록 원수 사랑의 영성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거저 주는 자가 되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비록 내가 힘들어도, 다른 사람이 도움을 요청할 때는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족은 쉽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친척이나 가까운 친구를 위해서는 때로 손해를 감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보편적인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낯선 사람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아낌없이 베풀어준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절하지 말고,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구제가 무엇입니까? 약1:27에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당하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돌보아주며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구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포기하시고,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가난한 자, 병든 자, 연약한 자들 편에 계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할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과 사람 앞에 작은 예수로 비춰져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5천 명분을 혼자 먹고 사는 사람과 5천 명을 먹이고 사는 사람. 사람들은 5천명 분을 혼자 먹는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부러워해야 할 사람은 5천명을 먹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5천명을 먹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우리에게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도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려고 하는 마음과 그것을 주님 앞에 내 놓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를 남겨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22년 동안 사랑나누기를 지속해 왔습니다. 주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것은 주님오실 때까지 우리 교회가, 그리고 앞으로 우리 후손들이 이어가야 할 사명입니다. 축복이 약속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아무쪼록 이 아름답고 위대한 일에 귀하게 쓰임받는 성도가 되셔서 5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윤리와 인간의 윤리는 처음에는 그 차이가 눈에 보이는 것 같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신앙윤리는 반드시 복음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윤리관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신앙윤리를 따라야만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윤리, 신앙윤리를 따라 살 때 하루하루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고, 새 힘을 얻고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윤리, 신앙윤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의 의를 바로 세우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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