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인생 (마태복음 24 : 15-21) 김은미 댓글 0건 조회 7,501회 작성일 2012-10-22 15:34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2012.9.2.주일낮예배 준비된 인생 마태복음 24 : 15-21 태풍 볼라벤의 위력이 보도되면서 그것을 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위기를 미리 대비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미련한 자는 일이 닥쳤을 때 우왕좌왕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고 대비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지막 날을 대비합니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도 언젠가 반드시 종말이 있게 마련입니다. 성경은 인류 종말에 대해 여러 곳에서 언급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종말에는 개인적인 종말이 있고, 우주적인 종말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종말은 개인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요, 우주적인 종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다시 오셔서 선악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 때는 태풍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환난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합니까? 개인적인 종말이든, 역사적인 종말이든, 마지막 때를 승리하기 위해 가져야 할 종말 신앙은 무엇인가? 첫째, 산으로 도망하는 신앙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환난의 때, 성도의 신앙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16) 그러면 산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왜 산으로 도망하라고 했는가? 기독교는 산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중요한 역사가 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①산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②산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훈련받은 장소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와 호렙산 근처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습니다. ③산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 모리아의 한 산에서 이삭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산은 오늘날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사2:2-3에 보면, 교회가 마지막 때 구원받을 산성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한없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자기 뜻대로 이끌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 결심하지만 쉽게 그 결심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환난의 바람이 불면 쉽게 넘어지고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쉽게 사탄과 이단에 미혹됩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으로 힘을 얻고, 훈련도 받고,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사람이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듯이, 계속해서 말씀을 먹고 은혜를 받아야, 성령 충만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믿음이 성장하고 훈련 받는 곳, 말씀으로 영적인 능력을 공급받는 곳이 어디입니까? 교회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주인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능력을 부어주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산으로 모이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개혁시대, 많은 신앙의 선조들은 로마교에 편안히 안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목숨 걸고 거기서 벗어나 바른 신앙고백이 서 있는 교회로 향했습니다. 개인적인 종말이든, 역사적인 종말이든 언제 그 때가 올는지 모릅니다. 아무쪼록 산으로 도망하는 신앙, 교회 중심의 신앙을 통해 마지막 환난 날에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내려가거나 돌이키지 않는 신앙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환난의 때, 성도의 신앙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17-18) 지붕에서 환난의 소식을 들으면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고, 밭에서 환난의 소식을 들으면 겉옷을 가지러 돌이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믿음의 우선순위를 결정해 주신 것입니다. 주석가 바클레이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냐 세상이냐’ 선택을 요구하는 대목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이 분명하지 못해 불행해진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길을 가면서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애굽을 빠져나와 구원의 길을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 길을 걷다가 어려운 순간을 만날 때면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나중에는 애굽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돌아가자’고 합니다. 결국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위를 바라보고, 앞을 향해 전진하는 존재입니다. 세상 가치관보다 영적인 가치관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런 신앙원칙을 가지고 사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고, 이것이 분명할 때 어떤 환난에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종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내려가지 말고 올라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선순위가 분명한 믿음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것을 기억하며, 세속적 가치관을 포기하고 경건에 힘쓰는 수준 높은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영적인 잠에서 깨어 있는 신앙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환난의 때, 성도의 신앙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20) 겨울은 활동하지 못하는 계절입니다. 팔레스틴의 겨울은 많은 비로 인해 땅은 질퍽거리고 몸은 추위로 얼어붙기 때문에 사람이 장거리를 이동하거나 피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겨울 신앙은 일하지 않는 신앙, 얼어붙은 신앙, 영적 잠을 자는 신앙을 말합니다. 또한 안식일은 유대법상 공식적으로 노동할 수 없는 날입니다. 심지어 유대 율법사들은 안식일에 1마일 이상은 여행도 못하게 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율법 규정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즉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은 쉬지 말고 열심히 일하며, 충성하는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영적으로 잠을 자면 영적 체온이 내려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나는 신앙, 움직이는 신앙, 뛰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처음 믿음의 열정, 처음 충성의 마음, 처음 가졌던 결심, 처음 가졌던 순종의 마음이 끝까지 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아니니아와 삽비라는 처음에는 충성스런 마음으로 자신들의 재물을 드리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막상 실행하고자 할 때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처음 믿음, 처음 결심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우상에게 절하라는 왕의 명령에 결코 순종하지 않습니다. 처음 가졌던 믿음, 충성이 변치 않았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 신앙의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잠자는 신앙, 얼어붙은 신앙이 아니라 더 뜨겁고, 더 열정을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 이 시대를 변화시킨 사람들, 인류에게 희망을 준 사람들은 대부분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킨 사도 바울도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좋은 가문 출신이었고,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최고 엘리트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복음의 열정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삶에 대한 열정, 사명과 복음, 비전에 대한 열정이 필요합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처럼 열정을 가지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때 어떤 환난의 바람이 불어온다 해도 천국까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열정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열정을 회복하십시다. 겨울신앙, 안주하는 신앙이 아닌, 열심을 다해 충성하며 천국까지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은 언제나 태풍을 대비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은 종말의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견고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런 인생의 태풍이 오든, 주님 재림하심으로 세상 마지막 날이 오든 준비한 자에게는 걱정과 염려에서 자유하며 오히려 담대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준비된 신앙을 통해 마지막 때 구원받고,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아쓰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나는 행복합니다 (신명기 33 : 29) 12.10.22 다음글분하여 함이 어찌 됨이냐? (창세기 4 : 1-8)12.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