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주께 피하는 자 (시편 17 : 6-9)
김은미 댓글 0건 조회 9,124회 작성일 2012-02-06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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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9.주일낮예배

주께 피하는 자 시편 17 : 6-9

구약에 보면 도피성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도피성이 어떤 곳입니까?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율법적인 생활철학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귀에는 귀, 눈에는 눈, 손에는 손... 이를테면 누가 내 귀에 상처를 입혔다면 반드시 그 사람의 귀에도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적인 철학을 적용하다 보니까, 때로는 고의가 아닌데도 피해 악순환이 자꾸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과실치사범을 보호하고자 만든 곳이 도피성입니다. 일단 도피성에 들어가기만 하면 어떤 죄인이든 생명은 보호받습니다. 도피성 안에는 대제사장이 상주하면서 죄인들을 교육하고 훈련합니다. 죄인들은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제사장이 죽으면 자유인이 됩니다. 이처럼 도피성은 죄인들의 특별한 피난처가 된 것입니다.

이런 도피성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사탄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죄로부터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 피난처가 되십니다. 죄 문제, 실패 문제, 인생의 어떤 문제를 지고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 피하면 구원과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본문은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환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10년 동안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때로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죽음의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런 다윗의 고백이 뭡니까? 주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잡으려고 2천 명 군사를 풀었지만 끝내 다윗을 잡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능력이 있어서 사울 군대에게 잡히지 않은 것입니까? 아니면 땅이 너무 넓어서 2천 명 군대로는 도저히 잡아낼 수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지금 우리나라 강원도 크기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윗이 사울 왕과 2천명 군대 앞에서 안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피난처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3편 6절에서 고백합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불안과 공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진국일수록 정신병 환자가 급증하고, 범죄 지수가 높아지고, 사람 마음이 강퍅해지고, 그러면서 환경은 어둡고 불안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감당 못할 시험처럼 큰 사건들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지 않는 자들은 자기 방법으로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권력을 어떤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을... 그러나 시편 146편 3절에 보면 하나님은 귀인들을 위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의지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자가 찾아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피난처 되시는 주님입니다. 다윗이 어떤 환난중에도 주님께 피했던 것처럼 오직 주님만이 나의 피난처가 되심을 믿고, 주님께 피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 피하는 자에게 어떤 은혜와 복이 있습니까?

다윗은 본문과 시편 여러 곳에서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 고 했습니다.

첫째, 주님께 피하면 원수의 손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신다” 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고 바르게 산다 해도, 원수는 있게 마련입니다. 아벨에게는 가인이 있었고, 이삭에게는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야곱에게는 에서, 다윗에게는 사울, 심지어 우리 주님에게도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모든 인생은 원수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영적 전쟁터와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살아간다 해도, 찌르고 쏘는 원수 세력들이 예수 믿는 우리를 모함하고 공격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는 누구입니까? 바로 사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 삶이 겉으로는 평안해 보여도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우리 주위를 돌며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탄은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 오느냐면 환경을 흔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겼는데도 환경은 도무지 변화가 없습니다. 자녀를 맡기고, 일터를 맡기고... 그런데 여전히 그 자리입니다. 오히려 그 문제가 우리를 삼키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환경에 얼마나 민감하고 약합니까? 환경이 복잡하고 힘드니까 의심하게 되고, 하나님께 맡긴 것에 대해 ‘내가 지금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괴롭고 고난이 오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변칙을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세상적인 방법으로 수단과 변칙을 찾아 나섭니다. 성경적으로 원칙적으로 살게 되면 계속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방법이요 속임수인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이 어렸을 때는 변칙의 유혹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있을 때 기근이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함으로 풀어가는 것이 성경적인 원칙입니다. 그 안에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원칙이요, 그것이 주님께 피하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기근이 없는 애굽 땅으로 가기로 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 땅에 가려고 하니까 새로운 문제가 보입니다. 아내 사라가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위기가 올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그는 고민 끝에 아내와 타협합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가져다주는 변칙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위기를 모면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세상적이고 인간적이고 사탄적인 것입니다. 결국 그 일은 아브라함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려워도 변칙보다는 원칙을 존중하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세상 방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피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욥을 보세요. 그가 당한 고난은 이유를 알지 못하는 억울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때 욥이 어떻게 했습니까? 변칙을 사용했습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지만 묻고 또 물었습니다. 이것이 욥에게 배워야 하는 성경적인 원칙이요 주님께 피하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탄의 손에서 욥을 구원하지 않습니까?

다니엘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왕 다음인 국무총리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사기로에 처했을 때 세상적인 방법이나 물리적인 방법을 조금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창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 공개적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께 피하는 자, 성경적인 원칙을 따르는 자를 귀하게 여기시고 후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환난의 때마다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라고 하며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시되 신속하게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8절에 보면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라고 신속한 보호를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날파리가 눈에 날아들면 눈꺼풀이 신속하게 닫히며 눈동자를 지켜줍니다. 마찬가지로 원수 세력이 우리를 공격할 때 주님께 피하면 신속하게 지켜주십니다.

다니엘은 정적들의 모함으로 사자굴 속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은 하나님께 피한 믿음을 보시고, 속히 사자굴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만의 계략으로 멸망 위기에 있었지만, 전적으로 하나님께 피한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믿음으로 큰 위험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하만과 그의 가족이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8장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원수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한 길로 들어왔지만 주님께 피하면 일곱 길로 쫓겨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울 때 사람이나 재물이나 권력에 피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구원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은 지금도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과 관계를 파괴하고, 사람과 관계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문제, 가정 문제, 자녀 문제, 건강과 경제문제, 직장과 사업 문제를 일으키고 파멸로 이끌어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탄일지라도 예수님 부활 앞에서는 항복했습니다. 사탄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무덤을 헤치고 다시 살아나시는 예수님은 막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한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께 피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 사탄에게 시달린다 할지라도 마침내는 승리할 것입니다. 왜입니까? 주님이 우리 피난처요 방패요 승리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님께 피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주님은 정죄에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시편 31편 1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라고 자신의 부끄러운 죄를 여호와께 맡깁니다. 간음죄도 살인죄도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믿고 맡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받아주십니다. 정죄함으로 영원히 부끄러운 자가 되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에게서 완전히 옮겨 주셨습니다. 우리 죄악이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흰눈같이 씻어 정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피하지 않는 자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5절에 보면,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부끄러운 구원, 상급 없는 구원은 죄 문제를 주님께 맡기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 찾아오는 결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거나 사람에게 맡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결과는 자학과 자해 길로 가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죄를 사람에게 맡기고 마귀에게 맡겨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울 왕은 자신의 문제를 신접한 여인에게 들고 갔습니다. 결국 자신은 자살하고 가문이 패가망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울은 부끄러움과 수치의 대명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또한 주님께 피하는 자에게는 실패에서 자유를 주십니다. 다윗은 시편 46편 1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 재난 중에 주님께 기도하는 사람을 결코 실패와 낭패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엘 2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왜입니까? 하나님 백성의 수치가 곧 하나님 수치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수치를 당하면 결코 참지 않으시고 그의 수치를 감춰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에 어떤 실패와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9장에 보면, 앗수르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왕 산헤립으로부터 하나님을 모욕하고 유다를 위협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했습니까? 그 편지를 성전에 들고 가서 하나님 앞에 펴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날 밤 하나님의 천사들이 앗수르 군대를 쳐서 십팔만 오천 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의 미움을 받아서 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유대에서는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니 로마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로 압송되게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로마로 가는 중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습니다. 20일 동안 계속된 풍랑으로 사람들은 살 소망을 잃어버리고 선원들조차 낙심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환경을 바라보고, 두려워 벌벌 떠는데, 바울은 담대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은 불신앙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온 우주를 주관하시고, 내 인생을 붙들고 계시며,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는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1초도 넘기지 않고 이 땅을 떠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참새 한 마리도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살리시기 위해 그 배에 타고 있던 276명 승객과 선원을 살려주셨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믿음이 온 배의 승객을 살리게 되는 진리를 믿게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바른 믿음을 가지면 우리 교회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바른 믿음을 가지면 여러분 가정이 복을 받고, 나라와 민족이 복을 받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구사일생으로 멜리데라는 섬에 상륙합니다. 난파선에서 구함 받은 처지이니 얼마나 어렵고 힘들겠습니까? 온몸이 젖어 추위에 떨게 되어 모닥불을 피웠습니다. 그때 바울이 모닥불 옆에 있다가 불을 더 피우기 위해 나뭇가지 뭉치를 불 위로 던졌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나무 더미 속에 있던 독사가 놀라 바울 손을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원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사람이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나님이 이 모습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진 풍랑에도 믿음으로 반응한 바울의 생명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한 276명 생명도 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바울이 살인자로 낙인찍히는 수치를 당하게 되는데 가만히 계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울을 독사의 독에서 구출해 주셨습니다.

원주민들은 이제 바울이 죽을 것이라고 주목하고 있는데, 바울에게 조금도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놀라 돌려 생각하기를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신이라고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원주민 추장 아버지가 이질과 열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바울이 그를 위해 안수하고 기도하여 낫게 합니다. 결국 그들은 바울과 일행을 후하게 예우합니다. 나중에 떠날 때는 배에 쓸 물건들을 후원해주는 놀라운 대접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요 일꾼인 바울을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심으로 바울도 영광을 얻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섬이 복음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 항로에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풍파 없이 행복과 건강이 보장되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쉽게, 빠른 시간 안에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인생은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실패의 바람이 불어오고, 환난의 광풍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실패 바람과 환난의 광풍이 온다 해도 두려워 떨지 말고, 주님께 피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님만 의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도 바울을 광풍에서 구원하시고, 독사 위험에서 살려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셨습니다. 주님께 피한 다윗을 긍휼히 여기셔서 수치를 면케 하시고, 이스라엘 5천년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께 피할 때, 주님은 구원의 복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복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주님께 피하면 주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 인생은 나그네와 같습니다. 나그네 생활의 특징은 피곤하며 안식이 없고 늘 불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셔서 우리가 나그네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로 영원한 기쁨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세상 어떤 보호도 일시적인 것이요 잠깐입니다. 그리고 그 보호가 공격으로 바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께 피하는 자를 한 번도 배반치 않으시고 보호하십니다. 시편 91편 5절에 보면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갈 때 광야를 지나갔습니다. 혼자 처음 가는 광야길이 얼마나 무섭고 힘들겠습니까? 벧엘에서 잠을 자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후 야곱이 고향을 향해 얍복강가에 왔을 때 형 에서가 400명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을 맞으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0년 전 일을 생각해 볼 때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날 저녁 야곱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축복하시고 에서의 칼날을 면하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을 일컬어 불확실한 시대, 예측불허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긴장하고 불안해합니다. 날마다 광야와 같은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피하는 자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때 바다를 열어 육지같이 건너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상황에 처할 때가 많습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옴짝달싹 할 수 없이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은 상황을 만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홍해바다를 가르시고 추격하던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돕고 계십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의식주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광야에서 필요한 만큼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메추라기를 보내주셨고, 물이 마시고 싶다고 하자 반석을 쳐서 생수를 주셨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언제 움직여야 할지 때와 시를 몰랐을 때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40년 광야생활을 함께 하셨습니다. 가나안을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리고성을 어떻게 함락시켰습니까? 소리만 지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리만 질렀습니다. 칼 한번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일곱 원주민들이 불을 켜고 싸움을 벼르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하나씩 싸워주셔서 가나안에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인도 없이는 이스라엘 민족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 도우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께 부름 받은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때로는 힘으로 때로는 피난처로 도우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도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어느 학자의 글을 보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것은 10퍼센트에 불과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90퍼센트나 된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영이신 하나님께서 천군천사를 통해 우리 삶을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까지 인도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과거를 인도하신 하나님, 지금도 도우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으로도 도와주실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중국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허드슨 테일러는 편지 한 통을 받습니다. 영국 선교본부가 재정궁핍을 이유로 선교 철수를 통지하는 편지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그 편지를 받고 밤새도록 철수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몸부림치며 기도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세 가지 응답을 주십니다.

그중 하나가 ‘에벤에셀’ 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두 번째 기도 응답은 ‘여호와 이레’ 입니다. 내 모든 필요를 미리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 받은 응답이 ‘임마누엘 하나님’ 입니다. 순간순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선교사님은 이 세 가지 기도응답을 놓고 결단을 내립니다. “영국 선교본부에서 보조를 중단할지라도 나는 자립선교를 하겠다” 그리고는 내륙으로 내려가 선교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에벤에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내 방법, 내 수단, 내 머리, 내 경험으로 여기까지 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의 필요와 문제를 다 아시고 이미 준비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미래가 어떤 모양으로 다가오든, 어떤 색깔로 다가오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때로 내 형편이 곤고하고 희망이 없어보일지라도,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에벤에셀 하나님, 여호와 이레 하나님,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으시고 주님께 피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날까지 주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의 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인생의 피난처는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믿고 의지할 때, 원수에게서 구원받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며 어떤 환경을 만나든지 주님을 피난처로 삼고 담대히 승리하는 포도원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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