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07. 주일낮예배 "큰 믿음, 큰 용기"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678회 작성일 2011-12-09 23:48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2011.8.7.주일낮예배 큰 믿음, 큰 용기 사도행전 4 : 13-22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다니엘서 3장을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믿음 좋은 세 친구가 등장합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금으로 큰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낙성식을 행하며 모든 신하들에게 그 신상 앞에 절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는 절하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왕이 그들을 불러 위협합니다.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않으면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위협에도 세 친구는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매우 진노했습니다. 그래서 풀무불을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풀무불에 던져 넣으라고 했습니다. 그 풀무불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군사들이 타 죽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친구는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담대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도 능히 건져내실 것이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 절하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여러분,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최고 권력자인 왕 앞에서도 담대합니다. 어떤 불이익이 와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는 절대 절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내놔야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믿음이 큰 믿음이요, 이런 용기가 큰 용기입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풀무불 가운데서도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온 나라 백성들에게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다고 선포합니다. 뿐만 아니라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였다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큰 믿음, 큰 용기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름이 높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에도 이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이 두 사람은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지금 법정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특이한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들을 위협하는 무리에게 위협을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정복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유대나라 국회라 할 수 있는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바리새인, 율법학자, 제사장, 이렇게 유대 지도자급에 해당되는 70명의 브레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종교 재판에 의해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 고발되었고,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처럼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막강한 권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면 할수록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세요.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6절,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21절,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막강한 권위와 힘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보잘것없는 두 사람을 데려다 놓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 신분을 따지자면 보잘것없는 사람들입니다. 갈릴리 가난한 어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삼년동안 따라다닌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때문에 예수 제자로서, 그들은 사회적으로도 그리 떳떳하지 못한 신분이었습니다. 왜냐면 죄수의 제자였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을 떨게 했습니까? 무엇이 그토록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천만이 넘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마땅히 강해야 하고 담대해야 하는데... 오히려 지푸라기만도 못한 초라한 모습은 아닌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때 베드로와 요한이 강해질 수 있던 비결, 유대 지도자들을 떨게 만든 그 비결을 오늘 우리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비결이 뭡니까? 첫째, 베드로와 요한은 진리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진리를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살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반면에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사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사느냐 집착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사느냐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 여기에 집착하게 되면 약해집니다. 비굴해지기 쉽습니다. 잘 살기 위한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남들에게 굽신거리게 되고, 권력에 아부하기도 하고, 물질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잘 사는 것보다 바르게 살아야 하고, 참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요 참되게 사는 것입니까? 바르고 참되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진리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진리와 함께 사는 사람은 바르게 살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당당할 수 있고, 그래서 강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인간을 잘 살게 하는 진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연과학 진리가 있습니다. 이는 자연 법칙이나 현상을 발견해서 활용하는 진리로, 인간이 발견하거나 발명해서 얻는 지식입니다. 사상적인 진리도 있습니다. 자유나 평등이나 인권, 민주주의... 이런 사상적인 진리는 인간 투쟁에 의해 쟁취되는 진리입니다. 자연과학 진리로 인해 인간 생활은 점점 향상되어 왔습니다. 편리해졌습니다. 또한 사상적인 진리로 인류 역사의 모든 제도는 개선되어 왔습니다. 즉 모든 제도와 사회 환경이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진리들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는 인간의 삶을 보다 잘 살게 만드는 데는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 노력과 투쟁에 의해 만들어진 진리입니다. 때문에 그런 진리를 만든 인간 자체가 죄악에 빠질 경우 그 진리들은 악용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과학기술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 무기로 둔갑하기도 하고, 많은 사상적 진리가 인간을 착취하는 제도로 둔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핵이라든가,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 그 속에서 우리 인류는 신음하며 고통을 당해 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가 뭡니까? 인간 자신이 죄의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자신이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진리가 추구되고 발견되는 과정 속에서 여러 잘못된 의도가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비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진리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절대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진리,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주신 진리... 그 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진리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진리를 터득하고 이 진리를 영접하고 이 진리와 더불어 살게 되면 우리 삶이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연적 진리나 사상적 진리는 인간을 잘 살게 만드는데 역점을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진리는 인간 삶을 변화시키는데 역점을 두는 것입니다. 거듭나게 만들고, 구원에 이르게 하고... 그래서 바르고 참되게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진리를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을 구원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리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담대하게 외친 것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내가 믿는 예수만이 구원이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 말씀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선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없었다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통해 구원 받을 수 있고, 선행을 통해 구원 받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심각하게 믿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밖에는 없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주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믿어야 거듭나고, 예수 믿어야 구원받고, 예수 믿어야 변화되고, 예수 믿어야 바르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절대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 인격을 내 인격으로, 예수님 말씀을 내 삶으로, 예수님 생애를 내 생애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때 강해질 수 있고, 담대할 수 있고,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보배를 지닌 질그릇에 비유했습니다. 흙으로 만든 그릇... 그 자체는 보잘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흙으로 만든 그릇일지라도 그 그릇에 금은보화가 담겨져 있다면, 그 그릇은 소중하게 보관될 것입니다. 이처럼 나는 연약한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 환경 속에서 고통을 당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 진리이신 예수가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9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그렇습니다. 살다보면 낙심과 실망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박해를 받을 때도 많고, 버림받을 때도 많습니다. 거꾸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2011.08.14. 주일낮예배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성회" 11.12.09 다음글2011.07.31. 주일낮예배 "죽음의 독을 제거하라"11.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