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05. 주일낮예배 "기다림의 신앙"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886회 작성일 2011-12-09 22:45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2010.12.5.주일낮예배 기다림의 신앙 누가복음 2 : 25-38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우리 설화 중에 망부석에 대한 설화가 많습니다. 아내가 집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그대로 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신라 눌지왕 때 충신, 박제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눌지왕의 두 동생이 하나는 고구려로, 하나는 지금 일본인, 왜에 볼모로 잡혀갔습니다. 박제상은 왕의 근심을 알고 먼저 고구려로 가서 왕의 동생을 구해 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일본에 건너가 또 다른 왕의 동생을 구해 신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붙잡혀 자신은 오직 ‘신라의 신하’라고 고집하다 죽고 맙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망부석이 될 지경까지 기다리는 것인가? 그 기다림에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이 최고 가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치가 있는 것은 기다리게 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 아이패드가 출시되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받기 위해 새벽부터 와서 기다렸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왜 잠을 설쳐가면서 추운 새벽부터 와서 기다리는 것입니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하는 오늘 이 시대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기다림’일 것입니다. 3초의 인내는 대단한 인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은 기다리게 되어 있습니다.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오랜 기다림 끝에 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늘에 별과 같이 바닷가에 모래알같이 수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25년을 기다려서 결국 100살에 이삭을 낳았고,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노아도 기다림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비로 온 세상을 멸할 테니 배를 만들라고 명하셨습니다. 노아는 산꼭대기에 배를 만들며 120년을 기다렸습니다. 120년을 기다린 것입니다. 결국 그 기다림으로 그와 가족들만이 구원받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본문에도 기다리는 일에 성공한 사람이 나옵니다.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면 오랜 동안 메시야를 기다린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의 필요와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습니다. 당시는 희망이 단절된 시대였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으로 부패했으며, 백성들은 흑암에 놓여 있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이나 희망의 메시지도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므온과 안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반드시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희망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기다리는 일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소원대로 메시아를 만나는 은혜와 구원의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기다림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강림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강림절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로, 두 가지 기다림의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구세주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므온과 안나처럼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강림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가치를 인정하고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 보여준 기다림의 가치, 기다림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 사랑에서 비롯된 기다림입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나이가 많았습니다. 29절에 보면, 시므온은 예수님을 만난 후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나이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안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나는 36절에 “나이 매우 늙었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나이가 많아 노년이 될 때까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본문 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당시는 언제 주님이 오실지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언제 오셔도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진실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37-38절을 보면, 안나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섬기며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증거입니다. 청춘남녀가 서로 사랑해보세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상대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고, 상대방이 기뻐하는 일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뭐든지 아낌없이 주고자 하지 않습니까? 이는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사모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이방인 백부장으로, 경건하고 하나님 말씀을 사모했다고 했습니다. 하루는 환상 중에 베드로를 청하라는 계시를 받고, 베드로를 집으로 청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배국 백부장이 피지배국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맞이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결국 그의 온 집안사람이 세례를 받았고, 그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장벽을 무너뜨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의롭고 경건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죄를 멀리하며 죄를 다스리고 죄를 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죄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경건하고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어떻게 우상의 땅에서 경건하게 살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죄악의 땅에서 죄악을 멀리하며 살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그 삶이 무게와 깊이가 있고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판단과 우선순위가 분명하고 질서가 바로 잡힙니다. 그런 삶은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15세기 한 공작이 레오날도 다빈치에게 ‘최후에 만찬’을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서 완성한 후 친구에게 평가를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그림을 보더니 감탄을 했습니다. “좌우에 제자들을 배치한 것이 좋고 무엇보다도 손에 든 은잔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빈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붓으로 그림을 지워버렸습니다. 깜짝 놀란 친구가 왜 아깝게 그림을 지워버리느냐고 하자 “이 그림은 예수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잔이 중심이라니 실패작”이라고 하면서 지워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과연 하나님 중심, 교회중심, 말씀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특별히 성탄을 맞이하면서 나는 얼마나 진실하게 주님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늘 오는 종교 절기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면 예수님은 은잔으로, 액세서리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탄을 맞이하면서 하나님 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첫 신앙의 은혜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시므온과 안나처럼 오랜 시간 인내하며 주님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한 희생과 헌신 어렵습니다. 주님 만나는 감격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처음 믿을 때는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나름대로 주님과의 첫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도 귀하고 감격스러워 기도하다가 성경을 읽다가 밤잠을 설치지 않았습니까? 말씀 듣다가 울고, 기도와 찬송을 부르다 울고, 그런 감격의 기간들이 아니었습니까? 내 모든 것, 목숨까지라도 다 바쳐 충성하고 헌신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모습은 어떻습니까? 처음 믿을 때 주님을 사랑하던 순수하고 간절했던 그 사랑을 회복합시다. 신앙생활의 위기는 성경을 모른다든가 교리를 모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 주님을 사랑하던 그 감격의 사랑이 식어지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강림절기, 먼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도 회복되고, 말씀도 회복되고, 기도도 회복되고, 헌신도 회복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강림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민족 사랑에서 비롯된 기다림입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어떻게 오랜 기다림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초월적인 민족 사랑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고, 38절에도,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랐다”고 했습니다. 당시 시대상황을 보면 지도층인 사두개파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로마 권력층에 붙어 평민들을 박해했습니다. 바리새파는 자신들만 경건하다고 자랑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아예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에세네파는 이것저것 보기 싫다며 은둔생활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버려진 백성들, 아무도 위로하지 않는 백성들, 밟으면 밟힐 수밖에 없는 백성들에게 그들을 대변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간 희망의 메시지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온과 안나는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2010.12.12. 주일낮예배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 (성서주일) 11.12.09 다음글2010.11.28. 주일낮예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11.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