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20. 주일낮예배 "상황을 극복하는 믿음"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201회 작성일 2011-12-09 18:31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2010.6.20.주일낮예배 상황을 극복하는 믿음 욥기 1 : 20-22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요즘 지구촌은 남아공 월드컵 열기로 참 뜨겁습니다. 우리나라도 모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이 남아공에 가 있을 정도로... 신문이건, TV건, 인터넷이건, 모두 월드컵 뉴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은 승패 외에도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공인구로 채택된 자블라니입니다. 이 자블라니 때문에 울고 웃는 나라와 선수들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블라니는 공격적인 축구를 유도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무게도 가볍고 공기 저항도 적어, 마치 탱탱볼을 차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힘을 줘도 뻥뻥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또한 공의 바운드가 불규칙해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아서 패스와 슛에서 실수가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아무리 실력 있는 프로선수라 해도 그 공을 다루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변수는 고지대에 위치한 운동장이 많다는 점입니다. 고지대에서는 산소가 부족해 신체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더 쉽게 지치게 됩니다. 게다가 공기저항이 없기 때문에, 일반 경기장에 비해 경기력 저하가 크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번 아르헨티나 전에서도 1,750m 고지대에서 경기를 했는데, 그래서 경기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공이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실력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공이 어떻든, 기후가 어떻든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실력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잠깐은 혼돈이 온다 할지라도, 결국은 준비된 자, 능력 있는 자가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월드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때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자블로니 같은 상황을 만날 때도 있고, 고지대와 같은 환경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유익을 준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악재로 변하고, 우리 삶을 흔드는 상황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공이 어떻고, 기후가 어떻고, 하는 문제는 핑계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능한 농부는 하늘만 보고 농사짓는 것이 아니라 일기조건과 관계없이 전천후 농사를 짓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전천후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천후 신앙이란 어떤 신앙을 말합니까? 전천후 신앙이란 환경과는 무관한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막에서 싸워도 이기셨고, 성전에서도, 산꼭대기에서도 이기셨습니다. 이것이 전천후 신앙입니다. 고난이 와도 무너지지 않고, 평탄함이 와도 썩지 않는 신앙, 그것이 바로 전천후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욥의 신앙이 이와 같았습니다. 욥은 상황과 환경에 따라 쉽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형통할 때도, 불통할 때도, 어떤 환경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욥을 통해 주시는 영적 메시지는 뭡니까? 첫째, 전천후 신앙은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사람은 대부분 조금 잘 살게 되면 교만하게 되고, 작은 고난이 와도 곧 낙심해서 헤어나지 못하는가 하면, 시대 변화에 따라 수없이 자기 생각을 바꾸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모습이요, 한계입니다. 사실 우리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은 일에도 감정이 상해서 우울해 하는가 하면, 또 별 것 아닌 일에 기분이 좋아져서 싱글벙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인간 감정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병이겠지만, 얕은 물가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출렁인다면 그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축구팀이 그리스전에서 참 잘 싸웠습니다. 그러자 감독과 선수들에 대한 칭찬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 전에서 참패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감독과 몇몇 선수들에 대해 비난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물론 안타까운 경기였습니다. 그런데 상황과 환경에 따라 감정 변화가 너무 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현실을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조금 잘 살게 되었다고 너무 큰소리치면서 우리 생활을 한껏 부풀렸다가, 경제 위기가 닥치니까 또 이제 망할 것처럼 죽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요동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 삶의 무게중심을 환경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금방 있다가도 금방 사라지는 세상가치에 삶의 중심을 두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삶이 환경과 상황에 따라 쉽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 환경과 상황에 따라 너무 쉽게 흔들리는 삶을 다스리고, 바로 세우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의 진리를 붙잡을 때, 우리 흔들리던 신앙과 삶도 안정되고, 반석 위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신앙의 뿌리를 내릴 때, 아무리 폭풍우가 몰려 와도 흔들리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욥을 통해 이와 같은 신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욥의 생활은 겉으로 볼 때 급격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는 큰 부자였고, 7남 3녀의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많던 재산이 없어지고 자녀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를 보고 아내도 욥을 떠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 자신은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악성 종기로 죽을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에 대한 욥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신앙에 흔들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욥의 신앙에 흔들림이 없었던 이유가 뭡니까? 1) 욥은 하나님 주권을 절대 인정하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게 뭡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① 예수 중심의 사람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적은 것이든 큰 것이든 하나님 것이요, 나는 단지 하나님께 위탁받은 관리인, 청지기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만할 수가 없고, 그래서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은 하나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파산된 뒤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것을 도로 찾아가신 줄로 믿었습니다. 욥의 신앙은 하나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이 신앙 때문에 불행한 상황과 환경을 만났지만, 억울해하지 않았습니다. ② 예수 중심의 사람은 삶의 중심에 예수가 있기 때문에 넘어졌다가도 일어서고, 거꾸러졌다가도 다시 섭니다. 우리 자신에게 힘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가 힘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③ 예수 중심의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이 기뻐하실까 생각하며 일합니다. 누구를 대하든지 주님을 섬김같이 합니다. 예수 중심으로 일하고, 예수 중심으로 생각하고, 예수 중심으로 행동하고, 예수 중심으로 계획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 예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 신앙의 기본이 될 때 환경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상황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2) 욥은 하나님 섭리를 믿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때때로 고난이 닥쳐옵니다. 이때 잘못하면 왜 이런 고난이 오는지 의심하며 하나님 사랑과 능력에 대해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선한 목적을 이루시고자 때로는 고난도 허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더 복되고 아름답게 만드시고자 부단히 일하십니다. 이게 하나님 섭리인 것입니다. 욥은 고난 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욥은 자기가 당하는 고통에는 반드시 뜻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을 순금같이 단련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모든 불순물과 찌꺼기를 제거하시고, 새 사람이 되게 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연단 중에도 끝까지 인내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음악 평론가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해설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내면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고, 천재성을 집중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시대의 무미건조함이나 범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귀머거리가 된 것이 순전히 비참한 일 같지만 하나님 섭리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고난을 통해 베토벤을 연단하시고 위대한 음악을 탄생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고난도 형통함도 다 하나님 손 안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인생은 하나님 작품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섭리 신앙이 여러분 기본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때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감사하며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욥은 영생을 믿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흔들리는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흔들립니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환경에 요동하지 않도록 그 마음을 잡아주십니다. 여러분,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며, 성경 진리의 말씀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죽느냐 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를 뿐입니다. 죽음을 숙명적인 죽음, 철학적인 죽음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2010.06.27. 주일낮예배 "민족의 성화를 소원하라" 11.12.09 다음글2010.06.13. 주일낮예배 "하나님의 형상 회복" (청장년세례)11.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