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2009.08.30. 주일낮예배 "왕같은 제사장"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141회 작성일 2011-12-09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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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8.30.주일낮예배
베드로전서 2 : 9 "왕같은 제사장"

 
아주 추운 겨울 냇가를 건너본 적이 있습니까? 한 사내아이가 어린동생을 데리고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한참 가로질러 가는데, 중간쯤에 얼음이 갈라져 틈이 보였습니다. 그 틈은 어린 동생이 건널 수 없을 만큼 폭이 넓었습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형은 자기 몸을 엎드려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어린 동생은 형 몸 위를 걸어 그 틈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다리가 되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사람이 절대 넘을 수 없는 틈에 다리를 놓고자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십자가 다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구원받은 백성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십자가 다리처럼 큰 희생은 아니더라도 수시로 작은 손길, 작은 다리를 필요로 하는 곳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믿는 사람은 다리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 믿는 사람들 신분에 대해 "왕같은 제사장"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레위 족속 중, 아론 지파에서 구별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제사장은 예수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 제사장이 담당한 일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사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폰티넥스’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다리를 놓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왕같은 제사장인 우리가 바로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사장으로 부르신 것은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축복으로 다리를 놓는 사람, 불안에서 평안으로 다리를 놓는 사람, 분열에서 일치로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하반기 태신자 작정주일입니다. 태신자전도운동을 맞이하면서 나는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죽어가는 영혼 사이에 다리를 놓는 제사장의 삶을 결단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영적 진리는 무엇이냐? 어떻게 우리는 세상 속에서 다리를 놓는 제사장 직분을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 긍휼을 통해 다리를 놓는 제사장이 되자는 것입니다.

긍휼이라는 말을 쉽게 말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헬라어로 '엘레오스' 라는 말인데, 이는 "비참한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을 오히려 불쌍히 여겨 그를 돕는 미덕"이라는 뜻입니다. 즉, 긍휼은 불쌍히 여기고 돕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깊이 공감하는 ‘마음’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고통을 제거해 주는 ‘행동’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웃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여기는 것이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은 제사장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한 성품인 것입니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고라 일당이 당을 지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는 반역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땅바닥이 갈라져 고라 일당과 그들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재물을 삼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일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순식간에 멸하려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염병이 임했고, 그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모세와 아론은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합니다. 염병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죽어갈 때 죽은 자와 산 자 중간에 서서 백성들이 더 이상 죽지 않도록 속죄했습니다.
"이에 모세가 이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 아론이 모세의 명령을 따라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민수기 16장 46절로 48절 말씀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긍휼입니까? 아론은 자신들을 원망하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향로를 가지고 달려갑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달려가서 그들을 속죄합니다. 그래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서 염병이 그치게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속죄 은총은 긍휼에 있다고 하는 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닙니다. 아론이 죽어가는 사람을 향해 달려간 것처럼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달려가는 것, 그것이 제사장이 가져야 할 긍휼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것이 영성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온갖 고통을 경험하셨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속죄의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가 되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께서 인생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를 충분히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긍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거라사 지방에 군대귀신 들린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 살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도 자기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쇠고랑도 끊어버리고 늘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을 자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분노와 죄책감, 탐욕과 시기와 질투, 이런 감정 때문에 밤잠 이루지 못하고 불안한 시간을 보낸 적은 없습니까? 이런 것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그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군대귀신 들린 사람은 이런 감정 속에서 밤낮 없이 무덤이나 산으로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의지도 어쩔 수 없었고, 가족들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군가 도움 없이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자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신비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저주의 사람,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찾아가셔서 만나주시고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십니다. 그를 올바른 정신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왔을 때 그는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데가볼리 지역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군대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저주 인생에서 축복 인생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여러분, 긍휼은 사람을 살리고,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게 한다고 하는 거, 스데반이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긍휼히 여겼을 때 거기서 위대한 복음 전도자 사도 바울이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알기 전,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긍휼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에게 필요한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긍휼의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를 통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하는 거, 세상이 따뜻해지고 아름다워지는 역사가 나타난다고 하는 거, 아무쪼록 긍휼의 영성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제사장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중보기도를 통해 다리를 놓는 제사장이 되자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 제사장 역할 중 중요한 것은 중보기도입니다.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범죄합니다. 그때 모세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하나님과,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십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롯이 살고 있는 땅에 유황불로 심판하실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죄가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조카 롯과 그 가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끈질긴 타협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의인 10명만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의인 10명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끈질기게 기도한 아브라함을 보시고 조카 롯을 건져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롯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기도 후원자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고 하는 거, 기도의 사람이 배후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축복입니다. 전도했을 때 생각밖에 쉽게 결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면 누군가 뒤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롯의 구원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 뒤에는 기도로 하나님과 롯 사이에 다리를 놓은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중보기도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구원받았고,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고 하는 거,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보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중보기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제사장이 되라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환경까지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중미에 과테말라 라는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 알모롱가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는 기독교인구가 0%에서 92%로 변한 기적의 도시입니다.
돌 세례를 퍼부었던 깡패들이 변화되어 지역 목사들이 되었고, 4개나 되는 감옥은 폐쇄되어 지금은 결혼식장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20여년 전만 해도 알모롱가는 폭력이 난무하고 부모들은 자녀교육에 관심도 없고 아주 가난했습니다. 성인 남자들은 대부분 알코올중독으로 늘 크고 작은 싸움을 반복했습니다. 얼마나 범죄가 심했던지, 크지 않은 도시에 4개 감옥도 부족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또 죽음의 신, ‘마시몽’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심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알모롱가는 가장 깨끗하고 행복하고 풍성한 도시로 변화되었고, 가정이 회복되었으며, 빈곤은 완전히 없어졌다고 합니다. 도시에 있는 모든 교회가 뜨거운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과테말라 사람들은 알모롱가를 ‘교회의 도시’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36개 술집 중 33개가 없어졌고 음주습관도 없어졌으며 이는 범죄율 감소로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이 지역 출신 마리아노 목사님의 목숨을 건 중보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고향을 더 이상 위험하고 어두운 도시로 남겨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3~4일씩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고, 이 금식기도는 모든 성도들을 통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눈에 띄게 성장했으며, 불치병을 앓던 사람들이 기도의 힘으로 고침 받는 일들이 일어났으며,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주님 앞에 회개하고 도시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도 위력은 이 지역 농업용 토지들도 변화시켰습니다. 갑자기 샘물이 터지고, 토양까지 비옥한 토질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수확물들이 커지고 영양분도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농작물 크기가 2~3배씩 커지고 맛이 좋아졌으며 수확량도 비교조사결과 영적 각성 이전보다 무려 천배 이상으로 늘었습니다. 이런 변화에 대해 미국과 남미 몇 나라에서 농업전문가들이 방문해 조사했지만 특별한 원인을 발견할 수가 없다고만 보고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적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특별한 비료를 준 것도 아니고, 이전보다 밑거름을 더 한 것도 아닌데, 땅이 달라졌습니다. 땅이 고쳐진 것입니다.
이것이 중보기도 위력입니다. 중보기도할 때 하나님은 영적인 토양뿐 아니라, 토지까지도 고쳐주셨다고 하는 거, 환경까지도 고쳐주시고 축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이제 기도하는 제사장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죄 가운데 빠진 사람 가운데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성도와 성도간에 잘못된 관계 속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자신과 잘못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중보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화해의 다리를 놓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중보기도라는 최고 선물을 주시기 바랍니다.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롯은 기도하는 삼촌 아브라함이 있었기에 유황불 심판에서 극적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알모롱가는 중보기도를 통해 기적의 도시, 축복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보기도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합니다. 환경까지도 축복을 받게 합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구애받지 않고 강한 영향력을 나타냅니다.
여러분,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누군가가 생각난다면 태신자로 작정하시고 그를 위해 중보기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다리를 놓는 왕같은 제사장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축복을 통해 다리를 놓는 제사장이 되자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0장 8절에 보면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라 명하십니다.
여러분, 제사장 나라는 축복의 나라요, 제사장 공동체는 축복 공동체입니다. 복을 받고 복을 빌어주는 축복 공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6장 22절로 2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축복의 권한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게 하라’
왜 축복하라고 하신 겁니까? 27절에 보면,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할렐루야! 제사장이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그대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 시대에 축복 권한은 오직 제사장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축복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축복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복을 빌어주는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제사장이라고 하는 거,
그러면 어떻게 축복해야 합니까?

1) 하나님께서 지켜달라고 축복해야 합니다.
민수기 6장 24절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기서 ‘지킨다’는 말은 ‘가시로 둘레에 울타리를 치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너를 지키시기를 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울타리를 치듯이 상대방을 감싸주시고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달라, 보존해달라는 기원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각종 질병과 재난이 있고 악한 자의 위험이 있습니다. 요즘 신종 플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까? 또한 예기치 못한 불행이나 환난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 대적 사탄 마귀는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처럼 위험한 세상을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는 거,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악과 위험과 재난에서 지켜주시기를 믿음으로 축복해야 합니다.

2)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축복해야 합니다.
민수기 6장 25절에는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즉 은혜는 이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거저주시는 특별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반드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는 하나님 주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인간 공로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거,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유로운 결정으로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같은 호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는 단순히 영혼 구원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범사가 잘 되고 삶이 형통해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기원하는 축복이야말로 최상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태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구원 뿐만 아니라 범사가 형통해지는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축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평강의 복을 축복해야 합니다.
민수기 6장 26절,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평강은 히브리어 ‘샬롬’ 이라는 말로 단순히 전쟁이 없고 마음이 평안한 상태만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경제적인 번영을 이루는 것이나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것이나 가정이 화목하고 평안한 것은 모두 샬롬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평강을 기원하는 축복은 삶의 만족과 안녕을 비는 것입니다. 평강한 삶은 복되고 형통한 삶이라고 하는 거,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처음 하신 말씀이 뭡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할렐루야!
여러분, 날마다 평강을 빌어주는 제사장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축복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와 평강을 빌어주는 제사장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차범근 감독이 신앙 간증한 내용에 대해 말씀드리고 말씀을 마칩니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 교회에 다녔고 중‧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19살 때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한창 이름을 날리게 되자 거칠 것이 없었답니다. 그때는 아시아에서 최고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날릴 때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살았답니다. 현재 명성에 자기 인생을 맡긴 것입니다.
그때 국가 대표로 한솥밥을 먹은 사람 중에 이영무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축구선수들이 제일 싫어한 사람이 이영무 선수였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영무 선수 곁에 가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당시 이영무 선수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믿어라. 예수께 네 인생을 맡겨라”고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도 쫓아다니고 찾아다니며 예수 믿으라고 하니까 기피대상 1호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차범근 선수가 이영무 선수에게 “너는 싫다고 하는 사람을 그렇게 쫓아다니며 예수 믿으라고 하냐? 그래서 사람들이 너를 다 싫어하는데 네가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며 비꼬고,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차범근 선수 신앙관은 ‘사람은 누구나 한가지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 되지 않나. 그것이 기독교든지, 불교든지, 유교든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월드컵 예선경기를 앞두고 어느 날 갑자기 무릎과 다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더 이상 뛸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그는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오기 시작하더랍니다.
‘여기서 내 축구인생은 끝나는구나. 내 명예도 끝나는구나.’ 앞이 캄캄하고 두렵고 괴롭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예수쟁이 이영무 선수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영무야. 성경에 병자가 치료받는 기사가 있지?” “그럼, 있고말고.” 이영무 선수는 신이 나서 성경을 가르쳐주며 ‘이제부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병 낫기를 간절히 기도하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차범근 선수는 극적으로 무릎을 회복하게 되었고, 그후 독일에서 축구선수로 이름을 빛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차범근 선수는 이영무 선수 때문에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영무 선수의 긍휼의 마음, 중보기도, 축복의 선포를 통해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철저한 자기관리, 신앙관리를 하는 스포츠맨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태신자를 작정하는 날입니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지 않으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영혼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다리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누군가 우리에게 다리를 놓아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 긍휼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서로 축복하는 제사장이 되시기 바랍니다. 육신은 살아있지만 영혼은 죽은 자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는 영혼들을 향해 다리를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복음을 듣는 모든 영혼과 가정과 환경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역사가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무쪼록 십자가 사랑을 전하는 여러분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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