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02. 주일낮예배 "의심은 반역자다 "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028회 작성일 2011-12-09 11:28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2009. 8. 2. 주일낮예배마태복음 14 : 22-33 "의심은 반역자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는 우리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평소에는 믿음이 있는 줄 압니다. 내가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보니까 내게 믿음이 없습니다.여러분, 내게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는 믿음이 필요한 순간이 되면 알게 된다고 하는 거, 평소에는 다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사용해야 할 때 진짜 믿음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겁니다. 평소에는 믿음처럼 보이지만 믿음이 아닌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적인 동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는 것, 그게 지적인 동의입니다. 이것은 마치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했다는 명제에 동의하는 것과 같은 차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구주시다 라는 명제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을 내가 실제로 의지하기 전까지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두 번째는 믿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믿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믿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면서 맹인된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믿고자 하나이다’ 대답합니다. 여러분, 믿고자 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좋고 마음이 열려 있고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고...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세 번째 문화적으로 동화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를 다니고 있고, 주변 사람이 다 믿는 사람입니다. 성경말씀을 들으며 자랐고 모든 면으로 볼 때 크리스찬입니다. 그런데 정작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내용이 비어 있습니다. 마치 전시장에 있는 전시용 차와 같습니다. 전시용 차는 겉만 그럴싸하지 속에는 엔진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내용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기독교 문화 속에 사는 사람 중에 이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나는 믿음의 사람인가? 아니면 상황에 따라 변하고 의심하는 믿음은 아닌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의심하였느냐?’ 이것은 수사학적인 질문입니다. 그 순간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기대하신 게 아닙니다. 이 질문은 의심하지 말아라, 의심을 버리고 믿는 사람이 되라, 이런 뜻으로 물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의심은 믿음의 적입니다. 잠언 24장 21절에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의심은 반역자와 같습니다. 반역자란 "이중으로 하다" "변장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이중인격을 품고 행동하는 자를 말합니다. 위해 주는 척하면서 사실은 해치는 것이 의심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본질이요, 모습이라고 하는 거, 믿음이 광명한 빛이라면 의심은 흑암입니다. 믿음이 기쁨이라면 의심은 슬픔이며, 믿음이 생명이라면 의심은 저주요 사망인 것입니다.그러면 본문 말씀이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이시간 말씀을 통해 의심의 반역자를 믿음으로 몰아내시기를 축원합니다.첫째, 왜 의심하는가? 의심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1) 환경을 바라보면 의심합니다.믿음은 바라보는 대상을 따라 변화됩니다. 문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본 것입니다. 바람을 보는 순간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보는 순간 의심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물위를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물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의심입니다. 의심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생깁니다. 예수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할 때 생깁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환경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입니다.그래서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환경을 바라보고 살 것인가? 주님을 바라보고 살 것인가? 물론 우리는 환경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환경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환경만 바라보면 환경에 정복당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환경을 초월하는 하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고 하는 거, 여러분, 환경은 거대한 파도처럼 우리를 삼키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보다 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람을 꾸짖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전능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환경을 이길 수 있고, 문제를 정복하는 힘을 얻게 된다고 하는 거,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영적으로 무지하면 의심합니다.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사람이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줄 알았습니다. 26절을 보세요. 예수님을 유령으로 오해하고, 무서워 소리 질렀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머리로만 알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알았다면 주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신 것을 보고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령이라고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도리어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다시한번 확인하고 찬양하며 경배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바다에 들어오기 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본문 앞부분에 보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인 기적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방금 경험한 기적을 보고서도 이와 같이 믿지 못한 것입니다.이는 영적 눈이 어두워져서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우리를 도우시고 함께 하시는 주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두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죽게 되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생명의 주로 영접하지 못하고, 의심하며 불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마귀는 우리 인생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오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소망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여러분, 이 시간 말씀들을 때 영적인 무지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깨닫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3) 마귀에게 현혹될 때 의심합니다.마귀는 언제나 의심하도록 현혹합니다. 사탄은 지금도 의심이라는 무기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사탄은 성경을 믿지 못하게 하고,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습니다.사탄은 얼마나 지혜로운지 모릅니다. 사탄은 말씀이 약한 자를 노립니다. 사탄은 우리가 말씀 붙잡고 있는 한 결코 타락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약한 쪽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직접 들은 아담보다 간접적으로 들은 하와에게 접근했습니다. 결국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집니다.또한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금하신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해 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고 그러다가 말씀을 아예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탄은 더 나아가 그것을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된다고 현혹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은 가장 매력적인 거짓말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최대 거짓말장이요 사기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사탄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하셨습니다.여러분, 사탄은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게 하고, 결국 생명에서 끊어지게 한다고 하는 거, 기억하시고 믿음으로 사탄 유혹을 물리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의심의 결과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1)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의심하면 늘 불안합니다. 의심은 마음의 평강을 빼앗아갑니다. 의심은 마음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의심은 우리 생활에 아주 해로운 존재입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거 아닙니까? 의심은 관계를 깨지게 합니다. 믿지 못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무너집니다. 의심하면 자신과 관계가 깨집니다. 의심하면 행복한 가정이 무너집니다. 오늘날 서로 불신해서 가정이 파괴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가정은 이런 가정이 없도록 기도하시고 믿음의 가정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또한 믿지 못하면 건강한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 불신하는 사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무슨 평안이 있고, 거기에 무슨 기쁨과 만족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침내 영적 정신적 육체적인 병을 일으킵니다. 요즘 울화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경희의료원에서 중풍병자를 대상으로 그 원인을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중풍병자 200명중 약 30%가 중풍병 원인이 울화병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신뢰관계가 깨졌다든지, 남에게 돈을 떼였다든지, 아니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근심 걱정에 빠졌다든지, 어쨌든 울화병이 결국은 중풍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심과 불신은 우리 삶을 병들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반역자라고 하는 거, 그래서 의심을 죽이고 의심에서 반드시 믿음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의심은 아무 일도 못하게 만듭니다.보통사람 10명 중에 9명은 의심 때문에 자기 힘을 시험해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시작도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 의심이라는 것입니다. 의심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의심하지 않았다면 계속 물위를 걷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여러분, 내가 의심보다 약하면 의심이 나를 이긴다고 하는 거, 의심에 사로잡히면 멈춰 서서 한번 더 살펴보고, 한번 더 생각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장애물은 점점 커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의심은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의심에 사로잡히면 전신마비 현상이 나타납니다. 기회가 와도 한발도 내밀지 못합니다. 의심은 목표를 단념시키고, 계획을 중단시킵니다. 용기를 꺾고 지력을 마비시킵니다. 의심에게 중심을 양보하면 공포가 가득하게 되고, 걱정과 근심, 낙담, 불신, 열등감, 자기 비하가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심을 몰아내고, 불신도 몰아내야 하는 것입니다.여러분, 믿음이 있을 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다고 하는 거, 그래서 용기를 갖게 하고, 그 용기로 모험도 하고, 진보하게 하는 것입니다.그러나 의심은 나의 반역자요 원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성공에 대한 의심 때문에 성공에서 멀어집니다. 위험이 적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뒤로 미루는 습관을 가져다줍니다.여러분, 의심하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위험이 있다고 하는 거, 그래서 우리는 의심을 버려야 합니다. 의심의 반역자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의심을 버리고 나도 주님 안에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고 하는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3) 의심은 희망을 빼앗고, 하나님 일을 그르칩니다.의심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의심이나 불신은 때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건실한 사람을 망가지게도 할 수 있고, 희망을 빼앗기도 합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지파별로 한명씩 12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12명이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를 합니다. 10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 사람들은 장대하고 그 땅은 듣던 것과는 다르게 젖도 꿀도 없는 험악한 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기엔 부적합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고 불신한 것입니다.그 보고는 전혀 희망이 없는 부정적인 보고였습니다. 백성들은 순간 낙심하고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모세를 돌로 치려 했습니다. 백성들은 "누가 우리를 애굽에서 끌고 나오라 했느냐, 누가 우리를 이곳으로 끌어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라고 하더냐"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누구보다 낙심한 것은 모세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도 하나님께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냐"고 울부짖었습니다. 그후 하나님은 모세는 물론이고 10명의 정탐꾼, 그리고 그날 불평하며 눈물흘렸던 모든 사람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소원하던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광야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심, 불신, 병든 정신을 가지고는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심은 이렇게 파급효과가 큽니다. 희망을 빼앗아가고 하나님 일을 그르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심은 반역자입니다. 불신은 우리 신앙을 무너뜨리는 반역자라고 하는 거,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셋째, 어떻게 의심이라는 반역자를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베드로 믿음은 한 순간은 바다 위를 걷는 강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순간 그의 믿음이 물속에 빠지는 약한 믿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입니까?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의심이라는 반역자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가? 믿음을 성장시키는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1)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우리는 믿음이 어디서 오는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들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믿음을 성장시키는 원리는 들음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듣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때마다 옥토 밭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씨앗이 좋아도 땅이 좋지 않으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믿음도 씨앗과 같습니다. 좋은 토양을 만날 때 잘 성장합니다. 좋은 토양이란 예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토양을 말하는 겁니다. 또한 믿음은 말씀을 듣고 실천함으로 성장합니다. 실천함으로 더욱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 이해가 안되는 말씀도 실천하면 믿음이 놀랍게 성장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여러분, 교회가 든든히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가정이나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삶의 문제 때문에 고통당하며 사십니까? 왜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지 못합니까? 말씀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니까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문제와 환경 때문에 낙심하고 고통받는 것입니다.여러분, 우리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더 알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은 예수님을 더 알고, 예수님을 더 경험할 때 강해지는 것입니다. 더 확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더 깊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고, 우리 믿음이 성장하게 된다고 하는 거,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2) 새로운 일에 도전해야 합니다.믿음은 안전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물위를 걷기 위해서는 배에서 나와야 합니다. 배안에 있으면 물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뒤로 물러서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새로운 비전을 갖는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땅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실패를 딛고 전진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제자들이 야유를 보냈을 것입니다. 주제를 모른다고 비웃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여러분, 비록 물에 빠지긴 했지만, 베드로는 도전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물위를 걸은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물에 빠졌지만 그의 생애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불가능에 도전할 수 있는 믿음을 마음에 품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실패를 통해 위대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실패를 무릅쓰고 모험하는 믿음은 위대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모험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갈 때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갈렙은 85세가 되었을 때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외쳤습니다.믿음의 법칙 가운데 중요한 것은 행동하는 법칙입니다. 우리 믿음은 안주할 때 약해집니다. 생존지향적인 삶을 살 때 우리 믿음은 약해집니다. 사람은 목적 지향적으로 살 때 가장 건강하다고 하는 거,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살 때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뿐인 인생입니다.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바꾸는 것은 행동입니다. 난 안된다는 사고방식을 난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으로 바꿔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새로운 인생을 창조하는 능력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거, 의심이라는 반역자가 죽게 된다고 하는 거,아무쪼록 생존 지향적인 삶을 살지 말고,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음의 확신가운데 서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3)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오트버그가 쓴 <물 위를 걸으려면 단순하게 믿으라> 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물위를 걸은 베드로의 믿음에 대해 기록한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베드로가 배 밖으로 나가야 할 중요한 이유는 배 밖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여러분, 우리는 배 안에 있을 때보다 배 밖으로 나갈 때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배 안에 있을 때보다 물 위로 걸을 때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됩니다. 안전한 장소에 있을 때보다 믿음으로 걸어갈 때 하나님을 더 생생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물 위로 발을 내딛는 순간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전진할 때 그의 믿음은 절정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만날 때 바람에 초점을 맞춥니다. 문제 때문에 낙심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람을 다스리시고 풍랑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이름이 주바라기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거, 해바라기는 늘 해를 바라봅니다. 우리는 주바라기가 되어야 합니다. 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예수님은 믿음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저자요,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2장 2절을 보세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여러분, 믿음이 성장하기를 원하신다면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의심에서 자유롭기를 원하신다면 바람을 바라보지 말고, 파도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베드로처럼 최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거, 그때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의심의 반역자를 이기는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거,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말씀을 마칩니다.믿음이 제대로 작용하면 믿음은 점점 더 강해지고 확실해집니다. 그래서 결국 무대를 지배하게 되고 의심이 들어올 자리를 막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조금이라도 주저하고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면, 의심은 그 틈을 이용해서 무대로 기어들어옵니다. 의심은 신앙의 조그만 틈이 생겨도 그 틈을 타고 들어와 영역을 점점 넓혀갑니다. 의심이 타고 들어왔는데도 그대로 내버려두면 어느 새 의심이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 믿음은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그래야 의심이라는 반역자가 우리를 흔들지 못합니다. 믿음 뿌리가 약하면 쉽게 무너집니다.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고, 조그만 풍랑이 일어도 빠져드는 것입니다. 아파도 넘어지고, 기분만 나빠도 넘어지고, 작은 환경에도 낙심하고 희망을 잃는 것입니다. 중국의 한 농부가 농장에 대나무를 심었습니다. 첫 해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해도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다섯 번째 해가 되었을 때 수백 평방미터 땅 밑에서 대나무 뿌리가 빽빽하게 퍼져 있었고, 마침내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많은 대나무 싹들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대나무들은 하루에 한 자가 넘게 자랐습니다. 불과 여섯 주 만에 대나무들은 15미터 이상씩 키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대나무들을 잘라다 팔아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이 대나무는 중국 동부에 자라는 것으로 `모소'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싹을 내기 전에 뿌리가 사방 수십 미터까지 뻗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싹을 내면 뿌리에서 보내주는 거대한 양의 자양분 덕분에 순식간에 키가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뿌리를 깊이 잘 박아야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좀 삶이 힘들어도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면 작은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고,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심의 반역자를 죽이고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 말씀 위에, 교회 안에 믿음의 뿌리를 든든히 내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승리하는 인생,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고 간증거리가 많은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2009.08.16. 주일낮예배 "에벤에셀의 축복" 11.12.09 다음글2009.07.26. 주일낮예배 "믿음으로 계산하라"11.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