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2009.05.31. 주일낮예배 "사람은 언제 소망을 잃는가?"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910회 작성일 2011-12-0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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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5.31. 주일낮예배
사람은 언제 소망을 잃는가?
요한복음 8 :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 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진정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상실"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런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이라고 보았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일까? 돈을 잃었거나 명예를 잃어서가 아닙니다. 내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사라질 때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원치 않는 인생의 위기로 인해 우리 소망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상황이나 환경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인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람은 언제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인가? 첫째, 가장 자부했던 기반이 무너질 때 소망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나인성이라는 동네에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외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 아들이 삶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믿음의 대상이었고, 삶의 기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갑자기 죽은 것입니다. 아들 하나만 의지하며 살았는데, 이 여인이 아들을 잃어 버렸으니 얼마나 고통이 되었겠습니까? 이 여인에게 아들의 죽음은 말 그대로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언제 절망합니까? 가장 믿었던 것, 가장 의지했던 것, 이것만은 안전할 거라고 자부했던 것이 무너질 때 좌절하고 절망한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제자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주님을 따를 때만 해도 그들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면 무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심과 함께 그들의 꿈도 야망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기들은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것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었지만, 어쨌든 믿었던 것이 무너져버리자 그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이런 믿음을 잃어버리자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버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고통이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3초 승부사라고 불리는 황호철 씨에 대해서 잘 아실 겁니다. 그는 IMF 직전에 평범한 직장에 있다가 퇴직금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하루 4시간만 자며 수십억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평생 벌어 놓은 수십억이 IMF를 맞아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충격으로 살 소망을 잃었고, 자살하려고 한강다리에 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스스로 자부했던 기반이 흔들리고 무너질 때 소망을 잃어버리고 절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 문제 아니었습니까? 그를 향한 부패의혹이 하나 둘 늘어났고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당혹감에 빠졌습니다. 전직대통령으로서 검찰 조사를 받았다는 것과 언제 구속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점점 조여오는 검찰조사로 심리적 압박감이 커졌습니다. 특히 청렴과 도덕을 외쳤던 자신이 온 국민에게 손가락질 받는 대상이 되었다는 게 참기 어려웠을 겁니다. 핵심 측근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며, 믿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자, 그런 상황들이 그를 외롭고 절망스럽게 만들었을 겁니다. 그는 스스로 자부했던 모든 것이 흔들리자 얼마나 괴로웠는지 “책을 읽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압박감, 좌절감, 수치감 등은 그를 절망하게 했고 이 절망감으로부터 그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죽음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람은 자기가 믿었던 기반이 흔들릴 때 좌절하고 삶의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것에서 자유할 수 있었다고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늘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에 믿음에 대상은 없다고 하는 거, 물질도, 사람도, 심지어는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들까지도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고 하는 거,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것에 매여 살게 되면 자유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이 꼭 필요하고 기쁨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유함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잃어버려서 삶을 포기하고,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한 것 때문에 절망하고 고통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는 진리되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는 죽은 아들로 인해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그곳에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관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예수님 말씀이 떨어지자 죽었던 청년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과부의 슬픔은 기쁨이 되었고 그녀의 절망은 소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절망에서 소망으로, 억압에서 자유로 변화된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는 예수님으로 인해 기쁨과 행복과 소망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만이 우리 믿음에 대상이라고 하는 거,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는 거,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승리하는 삶, 자유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인생의 짐을 가볍게 만드는 해결책을 찾지 못할 때 소망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세리장이었고, 부자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보면 그는 실상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인생에 많은 짐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 것을 착취해서 부자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들이 큰 짐이 되었을 겁니다. 죄의 짐, 탐욕의 짐,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고독의 짐... 여러분, 세상에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짐을 지고 있고, 아내는 아내대로 짐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이들마저 자기들의 짐이 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모든 사람들은 다 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짐을 내려놓지 못해서 방황하고 고통당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느냐? 첫째, 죄의 짐입니다. 인생에 모든 문제의 근원은 바로 “죄의 짐”입니다. 이 죄의 짐은 보이진 않지만 마음을 사정없이 짓누르고 생각을 억압하고 온몸을 짓누릅니다. 그리고 이 죄의 짐은 다 빼앗아갑니다. 기쁨도, 행복감도, 평안도, 자유함도 다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죄 때문에 절망하고, 죄 때문에 고통스럽고, 죄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그러면 이 죄의 짐으로부터 어떻게 자유할 수 있느냐? 여러분, 아이가 행복하려면 부모에게 가야 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난 죄인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 모든 죄의 짐을 대신 짊어지셨다고 하는 거,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의 저주에서 해방되어 자유해진다고 하는 거,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질병의 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든 질병에서 치료받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3분의 2가 치료일 정도로 병든 자를 고치는 일에 열심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예수님께서 우리 질병의 짐을 없애기 위해 매 맞으시고, 피 흘리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보면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고 말씀합니다. 우리 병을 치료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아픔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육체의 질병뿐만 아니라, 상처받은 마음도 치료해주시는 분이라는 거, 셋째, 욕망의 짐입니다. 사람에 욕망은 한이 없습니다. 사람 욕망은 가장 큰 바다와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바다가 큰 사람일수록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을 조사했다고 합니다. “10억원 이상 돈을 준다면 당신은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느냐” 물었더니 전체에서 53% 가 '예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관계의 법을 무시하면서까지 돈 버는 것만 성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를 중시하는 삶입니다. 돈은 언제 사라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제는 주식에 투자해서 돈버는 것보다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하는 일에 투자해야 할 때라고 하는 거, 어쨌든 이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지 않으면 결국 부모도 형제도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갈등이나 형제갈등 그리고 배반 등이 대부분 이 돈 때문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 욕망 때문에 사람들이 관계를 잃어버리고 죄를 짓고 자유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욕망의 짐도 다 가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나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넷째, 죽음의 짐입니다. 인생의 짐 중에서 가장 무거운 짐은 “죽음의 짐”입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사람이 갖는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은 죽음입니다. 고대로부터 이 죽음을 이겨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발버둥을 쳤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의 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예수님은 죽음에서 자유로우셨고,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죽으신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실 뿐만 아니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천국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기만 하면, 이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예수 믿기만 하면, “죄의 짐”, “질병의 짐”, “욕망의 짐”, “죽음의 짐”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인생의 참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에 구세주가 되심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어떠한 힘과 방법으로도 이 수고스럽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없다고 하는 거, 어떤 종교가도, 어떤 철학자도, 어떤 정치가도, 어떤 사상가도, 돈 많은 사람도, 사람들을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에서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런 짐을 지고 고뇌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인생의 모든 짐을 지고 산으로, 절로, 지인들을 만나는 것으로, 또 불교서적을 읽는 것으로 해결해보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어느 것으로도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함으로 모든 짐을 내려놓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다고 이 짐에서 자유해질 수 있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죄의 짐, 사망의 짐은 결코 내려놓을 수 없다고 하는 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죄 문제는, 죽음의 문제는 내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절망의 때, 그가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그가 모든 짐을 대신 져주시는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이런 안타까움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랬다고 하면 ... 하는 아쉬움이 목사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러분, 예수님은 인생 모든 문제의 해답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와야 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인생의 짐을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해결할 수 없고, 나를 불안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모든 짐으로부터 자유해지는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그릇된 운명관에 사로잡힐 때 소망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9남매 자녀를 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과 많은 자식들 때문에 늘 눈물의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과 담배를 달고 살았고, 몸은 신경성 위장병으로 꼬쟁이처럼 말랐다고 합니다. 40대가 되어 막내아들을 낳았을 때는 젖줄이 말라 태어난 아들에게 젖도 먹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점쟁이가 “너는 가난하게 살다가 50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늘 그걸 마음에 품고 가난한 것도, 저주와 같은 삶도 내 팔자라고 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동네 사람 권유로 난생 처음 교회라는 곳을 간 것입니다. 너무 답답하고 고통이 되니까 교회라도 한번 가보자 해서 교회에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교회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을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즐기던 담배가 역겨워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술도 끊었습니다. 그리고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인은 하나님 은혜를 체험하고 난 후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마음도 몸도 환경도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점쟁이는 50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녀는 95세까지 장수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여인이 40대에 낳은 아들이 서울에서 큰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그 가정은 예수 믿고 운명이 바뀌었고 팔자를 고친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운명관에 사로잡혀 절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 운명론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거, 노무현 전 대통령도 어느 무속인이 봉하마을에서 큰 사람이 날 것이다. 그러나 끝은 비참할 것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물론 거기에 크게 흔들리지야 않았겠지만... 어쨌든 우리나라 사람은 이 운명론에 약한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유교적인 관습 때문에 숙명론적 운명관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부부만 해도 그렇습니다. 천생연분이란 말을 해가며 태어날 때부터 결혼하기로 결정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사가는 날도 손없는 날을 잡아서 가고... 모든 게 팔자소관이다 하면서...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 예수 믿는 우리는 창조적 운명관을 가져야 합니다. 창조적 운명관이란 운명은 하나님 은혜로 내가 만들어가고, 개척해 가는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역대상 4장에 보면 야베스라고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 고난, 아픔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아들을 나면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 주지만 어머니가 이름을 지어준 것을 보면 야베스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즉 야베스는 선천적으로 슬픔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가진 운명을 뛰어 넘는 복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내 힘을 뛰어 넘는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야베스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내 지역을 넓혀달라고, 주에 손으로 나를 도우사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달라고... 야베스의 기도는 운명을 뒤집는 기도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의 구하는 것을 들으시고 복있는 인생, 영향력 있는 인생으로 축복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기구한 운명에 처했지만 비관하지 않고 새롭게 운명을 창조한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라는 청년입니다. 이 청년은 태어날 때부터 맹인입니다. 아버지가 맹인이며 거지인지라 이 아들도 숙명적으로 맹인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맹인으로 절망만 하고 있었다면 별 볼일 없는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바디매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절대 가까이 갈 수 없고, 볼 수 없었던 바디매오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시끄러워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결국 예수님께서 가시던 길을 멈추고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보기를 원한다는 바디매오의 말에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자, 맹인 바디매오가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맹인의 숙명적 운명이 창조적 운명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이 운명을 전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나 자신이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이씨, 박씨, 김씨로 태어난 것이 어찌 내가 선택한 것이며 내가 한국사람, 미국사람 혹은 황인, 백인, 흑인으로 태어난 것이 어찌 내 자신이 선택한 것입니까? 모두 나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태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는 주어진 운명과 함께 이것을 극복할 자유의지도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자가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특권입니다. 즉 같은 불행 속에 태어났고 자랐다 할지라도 한 사람은 행복한 길을 또 한 사람은 불행한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생의 신비와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운명에 지는 자가 아니라, 운명과 싸워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 살아 있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어떤 운명도 그를 종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운명의 노예가 되지 말고 운명을 믿음으로 다스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 운명은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는 운명도 자유해진다고 하는 거, 주님은 우리 운명이 가장 아름답게 진행되길 원하시고, 가장 아름다운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야베스와 같이 하나님을 붙잡고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바디매오와 같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향력있는 인생, 예수 안에서 운명으로부터 자유해지는 창조적인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랜스 암스트롱이라는 사람은 고환암을 극복하고 세계 최고 자전거경주에서 6연패를 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서전 <자전거, 그 이상의 이야기> 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내게 1%의 희망만 주어져도 나는 그 희망을 위해 달린다.” 단 1%의 희망을 가지고, 그 희망을 향해 달리면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1%의 희망은 생명을 위협하는 암도 정복하게 만들고, 1%의 희망은 죽음도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어떤 환경에서도 승리하게 하며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를 믿고 예수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위치에 있든지 담대하게 승리하는 성도, 어떤 환경가운데서도 자유할 수 있는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주변에 소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소망이 되신다고 복음을 전하며, 우리나라와 민족이 예수 소망가운데 다시 일어나고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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