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사에 형통한 자가 되라 (창세기 39 : 19-23) 김은미 댓글 0건 조회 6,785회 작성일 2015-07-06 16:02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2015.6.21.주일낮예배 범사에 형통한 자가 되라 창세기 39 : 19-23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본문은 요셉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셉이 형들에 팔려 애굽 보디발 집에 종으로 가게 됩니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으며 편안하게 지내던 요셉이 하루아침에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노예가 된 것도 부족해서 죄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범사에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완전한 절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범사에 형통한 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희망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을 만날 때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지만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역사하시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합니다. 요셉은 믿음의 해석을 통해 범사에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요셉을 통해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가? 첫째, 믿음이 있으면 과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대해 자유하지 못합니다. 마음에 분함이나 두려움, 미움, 시기 등 이런 것에 매이면, 마음에 응어리가 생기고 상처가 나게 됩니다. 이것이 정신적, 육체적, 생활적, 영적인 질병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평안함이나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요셉은 인생의 모든 응어리를 잘 풀어낸 사람입니다. 사실 요셉처럼 억울하고 분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노예가 되고, 죄수가 된 사람입니다. 누구나 요셉 같은 상황이라면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그리고 감옥에서 다른 사람을 탓하고만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인내하며 기도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요셉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 편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에게 상처 주는 사람, 자기를 이용한 사람을 증오나 복수를 품지 않고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우리는 과거 역사를 바꿀 수는 없지만 과거 의미는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꿔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는 항상 소망이 있고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으로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요셉이 보여준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배반한 원수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만이 해답입니다. 복음만이 미움과 다툼과 복수와 갈등과 분열의 고리를 끊을 수 유일한 대안입니다. 이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덧입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미움과 시기를 버리고 사랑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바 되어야 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과거에 좋지 못한 기억이나, 환경이 있다고 하면 믿음으로 푸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 과거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믿음이 있으면 현재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신세를 원망하거나 한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성실하게 반응했습니다. 결국 그는 애굽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성실했던지 가는 곳마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종의 신분이었지만, 보디발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정총무로 삼았습니다(창39:4). 억울하게 옥살이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수장이 요셉을 신뢰해서 옥중 모든 일을 요셉에게 맡겼습니다(22-23). 나아가 요셉의 성실함은 바로 왕의 신임을 받았습니다(창41:38). 요셉은 노예로 있을 때나 죄수로 있을 때나 총리로 있을 때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노예라는 신분, 죄수라는 신분, 이방인이라는 신분에 묶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있으면 충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은 오늘에 충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어느 조직이든지 그런 자가 많은 때 부흥과 성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는 자, 그래서 인정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환경이 어떠하든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함으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믿음이 있으면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100% 빛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밝아도 그 속에 어두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잘되었다고 다 된 것처럼 행동한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100% 어둠도 없습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그 속에 빛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게 끝났다고 절망하면 안됩니다. 그 속에 빛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 재림하시는 날까지 이 세상은 어둠과 빛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음의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는 자라는 것입니다. 절망 중에도 희망을 찾는 자입니다. 혼란 속에서도 언제든지 빛만 찾으면 길이 열립니다. 요셉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았습니다. 억울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소망이 있었습니다. 빛이 되신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요셉은 환난 속에서도 꿈을 해몽해주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낸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소망이 없었다면 종의 신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소망이 없었다면 감옥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절망 속에서도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현실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요셉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꿈입니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고 이방 민족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감옥에서 정치를 배우고 경제를 배우게 됩니다. 결국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꿈대로 민족을 구원하는 더 나아가 세상 이방 민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류 구원이라는 꿈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이라는 소망 때문에 능욕을 당하면서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문제 앞에서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눈앞의 환경 때문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소망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앞이 캄캄해도 그곳에서 빛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바라보며 기대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요셉처럼 이 시대 위대한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믿음으로 반응했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셉이 가는 곳마다 형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요셉이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축복의 물결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심으로 축복의 통로가 된 사람을 통해 개인 심령과 가정에, 세상 곳곳에 축복의 물결이 번져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는 절망의 소리, 원망과 불신의 소리, 갈등과 분열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이제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범사에 형통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당신의 부모, 형제, 자매, 심지어 당신이 기르고 있는 개나 고양이가 크리스천인 당신 때문에 더 행복해지지 못한다면 당신이 정말 크리스천인가 의문이 생긴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행해지고 있습니까? 요셉이 가는 곳마다 요셉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은 것처럼,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범사에 형통케 되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네 신앙을 진단하라 (민수기 14 : 1-10) 15.07.06 다음글인생의 위기 앞에서 (역대하 20 : 1-4)15.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