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으로 승리하라 (요한복음 20 : 19-23) 김은미 댓글 0건 조회 6,365회 작성일 2015-04-21 11:58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2015.4.5.주일낮예배(부활주일) 부활신앙으로 승리하라 요한복음 20 : 19~-23 기독교는 창조신앙, 구속신앙, 부활신앙, 세 가지 신앙의 큰 기둥이 있습니다. 믿음은 추상적이거나 지식적인 것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살아계신 예수님께 내 모든 인생을 맡기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신앙, 구속신앙, 부활신앙으로 살아갈 때 성경의 모든 약속과 기적이 믿어집니다. 그 약속이 나를 위한 축복의 말씀이고,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심도 믿어집니다. 오늘은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왜 부활신앙이 축복인가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 예수님의 부활은 평안을 회복시켜 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생각을 주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소망을 빼앗아가고,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우울증, 중독증, 스트레스 등 이러한 정신적인 질병으로 사람도 가정도 사회도 병들게 합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우리 마음의 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여섯 번이나 강조한 말씀이,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불안과 두려움으로 숨어버리고 말았습니다. 3년 동안 따라다닌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자기들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다락방에 모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뭡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21) 그런데 놀라운 일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기쁨이 충만해진 것입니다. 부활의 확신이 두려움을 정복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용기를 주고 소망을 준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십자가 죽음도, 맹수에게 찢기고, 화형장에 끌려가는 것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 신앙이 분명하면 어떤 두려움이 몰려와도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언제 어떤 일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 초라하게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우리 속에도 역사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힘주시고 용기 주시고 능력주심을 믿고, 담대하게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믿음을 회복시켜 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적으로 확신을 준 사건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에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이성적, 합리적, 과학적으로 믿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가 발전할수록 이성과 합리적 신앙생활을 추구합니다. 만져지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도마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도마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 도마는 주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주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28). 그의 믿음이 회복된 것입니다. 지식과 과학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이 아니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은 지식이나 과학보다 그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이끌어가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들어가면 지금까지 눈으로 확인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것만 사실이라고 생각한 가치관이 변합니다. 역사관이 변하고, 내세관이 변하고, 인생관이 변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이 의심 없이 믿어집니다.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그 주님을 의지하면 나를 극복하고, 환경을 다스리는 자가 되고, 사람과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집니다. 인격과 삶이 향상되는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능력인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의 자리는 어떻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인생의 어떤 사건을 만나든지 그 가운데서 일하고 계시는 주님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희망을 회복시켜 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눅24장에 보면,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절망한 나머지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눅24:13-14) 예루살렘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지만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왜입니까?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절망은 우리 눈을 어둡게 합니다. 내려가게 만듭니다. 포기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 열 명 정탐꾼을 보세요. 절망하니까 하나님의 약속도, 가나안 땅에 대한 희망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절망적이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환경에 있다 할지라도 희망을 선택하고, 희망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절망에 사로잡히자 주님도 약속의 말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시며, 부활 예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식은 가슴이 뜨거워졌고,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밤길을 달려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로마 권력이 두렵지 않았고, 유대교 지도자들의 살기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곤고한 분이 계십니까? 희망이 없어 낙심한 분이 계십니까?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가 어둠 속을 헤맬 때 구원해 주시며, 슬퍼할 때 위로해주시고, 연약할 때 강하게 하십니다. 아무쪼록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신앙의 현재성을 회복하셔서 날마다 부활신앙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은 영생을 회복시켜 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생을 주신 사건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우리도 주님과 같이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무덤을 가보면 ‘여기 누가 잠들다’ 비석만 있습니다. 그러나 동양 사람들은 무덤을 크게 합니다. 우리 종착역이 무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종착역은 무덤이 아닙니다. 무덤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저 높은 곳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기다림이 없는 생활입니다. 밤이 되었는데도 갈 곳이 없고, 또 돌아올 가족이 없다고 하면 얼마나 적막하겠습니까? 사람에게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죽은 후에 갈 곳이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임종의 순간이 다가와도 그렇게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순교하는 순간에도 얼굴이 천사같이 빛났다고 했습니다. 천국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천국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자는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이 오고 환난이 와도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천국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부활신앙으로 천국을 소망하며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우리나라 인천에 왔습니다. 모든 국제기구와 선교기구가 한국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한국은 버려진 땅, 절망의 땅, 소망이 없는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청년이 소망을 가지고 인천에 내렸습니다. 그리고 본국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부활절에 이곳에 왔습니다. 사망에 빗장을 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조선의 결박을 끊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빛과 자유세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절망의 땅이지만, 가난과 비극의 민족이지만, 부활의 주님이 빛을 비추어 주시면 어둠의 세력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30년 만에 이 놀라운 축복이 이 땅위에 부활절과 함께 주어진 것입니다. 부활절을 맞이해서 부활의 은총이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환경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부활신앙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고통에 그대로 굴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어려움은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과 일터, 어느 곳에 있든지 모든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부활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가정, 이 나라, 민족 가운데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거기서 나를 보리라 (마태복음 28 : 10-20) 15.04.21 다음글은혜의 십자가 (이사야 53 : 4-9)15.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