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로마서 1 : 16-17) 김은미 댓글 0건 조회 7,229회 작성일 2014-09-16 16:39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2014.8.24.주일낮예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로마서 1 : 16~-17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을 보면 어느 기독도가 고생 끝에 천성문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믿음표를 가지고 오지 못해서 다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다보니 예수님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것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구제하고, 정의를 실천하고, 섬김과 평화의 삶을 살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것은 열매이지 본질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은 다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7)고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겸손하고 청빈하며 귀감 되는 삶을 산다 할지라도, 복음 외에 선행을 통한 구원의 길은 본질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외치며 개혁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 세 가지 신앙의 본질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오직 성경입니다. 성경은 신앙의 중심이고 기준입니다. 신앙에서 성경이 경시되면 그 신앙은 근본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면 인본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외칠 때,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기준을 두고 그런 말을 하는가?" 그때 루터가 대답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권위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모든 것의 가장 권위 있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캐논, 정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무시하면 그 신앙은 신비주의로 빠지기 쉽습니다. 신비주의는 성경을 경시하고 감정적으로 해석해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신앙이 성경에서 이탈하게 되면 신비주의나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또 신앙은 이성주의에 빠져서 너무 지식이나 윤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객관성을 상실하고 개인감정이 앞선 주관적인 신앙도 문제입니다. 신앙은 말씀 중심에 근거한 건전한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이 말씀이 떨어지는 곳에 변화가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지난 2천년 동안 말씀에 의해 전해져 왔고 성장해 왔고 발전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 말씀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이 세상을 변화시켜 왔습니다. 루터가 이 말씀을 읽고 나서 변화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이 말씀을 읽는 동안 변화 받고 영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어거스틴이 이 말씀을 읽고 변화 받아 성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 말씀을 읽으면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말씀이 떨어지는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이 우리 인격과 삶속에 들어가 변화와 성장의 역사가 일어나게 합니다. 상처받은 영혼에 들어가 위로해 주시고, 병든 심령을 찾아가 치료해 주시고, 문제 속으로 들어가 회복과 응답을 주십니다. 깨닫게 하시고, 변화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 중심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결코 성경이 무시되고 성경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둘째, 오직 믿음입니다. 종교가 권세화되고 물질에 오염되면 믿음이 생명력을 잃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물질은 신앙과 큰 관계가 있습니다. 물질이 풍성한 사회는 어김없이 믿음이 식어갑니다. 가난했을 때 신실하고 뜨거운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이 부해지고 편해지면 그 신앙이 식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열정이 없어지고 뼈대만 남아서 차가운 신앙으로 변해버립니다. 중세시대는 기독교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물질도 풍요로웠습니다. 권세도 있었습니다. 외적인 도전이 없습니다. 그때 그들은 모두 인본주의에 빠져서 신앙의 힘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힘도 없고, 용기도 믿음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모습입니다. 그때 바로 면죄부가 등장합니다. 돈을 내고 면죄부만 사면 죄 사함 받는 것은 물론이고 천국에 가는 것도 보장되었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죽어서 천국가지 못하고 연옥에 가 있는 영혼들까지 영향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생명력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됩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수단이 나오고 편의주의가 나옵니다. 그때 루터가 구원은 면죄부가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가하시는 기준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은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로운 것 같아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의는 하나님이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공로나 자선, 선행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덕목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신앙, 믿음 없는 기도, 믿음 없는 선행, 이것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사람이나 교회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과 같은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고, 교회를 지킬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이것이 복음의 절대성입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셋째, 오직 은혜입니다. 은혜란 아무런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거듭나게 된 것도, 아름답게 사는 것도, 사명자로 사는 것도, 귀한 직분자가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믿고 구원 받았지만, 내 믿음마저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루어진 은혜입니다.(엡2:8)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심판에서 구원 받고, 심판 후에 노아를 통해 새로운 민족이 이루어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의 실수와 허물도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노아가 자격이 있고 공로가 있어서 구원받고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 사도 바울은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누구보다 수고를 많이 했지만 그것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고 오늘 여기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세 기독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했습니다. 불신했습니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구원받아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면죄부를 팔았고 사람들은 그 면죄부를 사서 구원받아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시대가 얼마나 우매한 시대입니까? 종교가 이렇게 눈이 어둡고 우매하게 되면 그 시대와 백성이 우매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오직 은혜”입니다. 아무쪼록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며 겸손하게 신앙생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신앙에는 길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신앙의 길로만 가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이탈하게 되면, 수단이 개입되고 인위적인 것이 개입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신앙은 본질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중세 기독교가 그 신앙의 본질이 변질되어 갔습니다. 선행을 강조하고 인위적인 것을 강조하다가 마침내는 면죄부까지 팔게 되었습니다. 그때 루터가 신앙의 본질을 강조한 것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우리가 이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면 우리 삶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힘이 있었고, 세상으로부터 칭송받는 교회가 되었으며, 부흥과 성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 신앙도 개혁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편안합니다. 안일함에 빠져 있습니다. 신앙이 자꾸만 형식화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힘이 있고 생동감 있는 그리스도인,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을 넘어 땅끝까지 아름다운 복음의 역사를 이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신앙과 창조적인 삶 (창세기 12 : 1-4) 14.09.16 다음글은혜 받은 자의 삶 (사도행전 3 : 1-10)14.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