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노시스 영성으로 희망을! (빌립보서 2 : 5-8) 김은미 댓글 0건 조회 7,482회 작성일 2012-01-25 14:32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2012.1.1.주일낮예배 케노시스 영성으로 희망을! 빌립보서 2 : 5-8 임진년 새해입니다. 새해에는 여러분과 가정, 일터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2년 우리 교회 표어는 ‘케노시스 영성으로 세상에 희망이 되는 교회!’ 입니다. 케노시스는 자기 비움, 자기 포기라는 말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 이런 영성이 있을 때 우리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케노시스, 자기 비움의 영성이 있을 때 이 사회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나를 넘어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성은 바로 케노시스 영성인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케노시스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케노시스 영성은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케노시스는 기다림입니다. 이는 나를 주장하거나 나를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케노시스는 나 자신을 숭배하고 높이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선언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다”(전7:8)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믿음으로 인내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음을 믿기에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벽에 이런 글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죽어가는 절박한 처지에서 피 맺힌 손톱으로 쓴 글씨입니다.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는다. 그 처참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기다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참을 수 있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만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케노시스 영성입니다. 여러분, 교만한 마음, 조급한 마음은 같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화내고 불평하고 소리를 지르고... 그런 곳에 무슨 평화가 있으며,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무슨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사울 왕을 보세요. 사울은 아버지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아가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왕 위에 있으면서 그는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 중심의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하나님 뜻보다 내 뜻을 내세우고, 하나님 기준이 아닌 내 기준을 따르고... 이것을 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일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왕에게 하나님 앞에 먼저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울왕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가 약속 시간보다 늦게 오는 겁니다. 이때 사울 왕이 어떻게 했습니까? 백성들이 동요하고 블레셋 말밥굽 소리가 들려오자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선지자 외에 할 수 없는 일,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번제 제사를 사울 왕이 드린 것입니다.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한 모든 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교만한 자, 인내하지 못한 자에 결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뜻이 계시겠지,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어 주시겠지, 이해할 수 없어도 인내하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케노시스 영성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케노시스 영성으로 산 사람을 사랑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역전시켜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힙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억울한 일입니다. ‘내가 아시아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구라파 쪽으로 가게 하시고,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지않았는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귀신 들린 사람이나 점쟁이도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왜 내가 지금 이렇게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원망이 되고 불평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찬송합니다. 기도합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나면서 옥터가 열리고 착고가 풀리는 겁니다. 그때 다른 사람 같으면 ‘그럼 그렇지’ 하고 도망갔을 겁니다. 이것이 당연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오래 참고 기다립니다. 이것이 케노시스 영성이요,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뭔가 일이 되어가는 환경인 것 같다고 쉽게 흥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지시가 없이 서두르는 것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기다림의 영성이 있었기 때문에 자살하려고 한 간수를 살려내지 않습니까? 만일 사도 바울이 조급한 마음에 도망갔다면 간수는 자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고 기다린 결과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한 생명을 살립니다. 그 가족을 구원시킵니다. 결국 그 가족이 장차 빌립보 교회의 초석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와 절대 주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결과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고, 함께 기적을 누리는 삶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기다림의 영성, 케노시스 영성이 있을 때 우리가 속한 사회가 은혜를 누리고 기적을 체험하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이방나라에 팔리고 노예생활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 불평 없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신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합니다. 결국 그런 요셉에게 하나님의 선함이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으로 인해 요셉 가족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심지어는 애굽 사람들까지 복의 복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도 응답의 싸인이 없고, 환경이 조금도 나아짐이 없어도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시고, 마침내 승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2012년, 케노시스... 자기를 내려놓는 기다림의 영성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고, 희망과 기적을 베푸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케노시스 영성은 주어진 멍에를 묵묵히 메고 가는 것입니다. 케노시스 영성은 주어진 멍에를 묵묵히 메는 것입니다. 멍에가 무엇입니까? 멍에는 짐승을 길들일 때 쓰는 도구입니다. 소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게 하려고 씌운 것입니다. 그래서 소는 주인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합니다. 소는 멍에를 메지 않고는 주인의 뜻을 따라 일할 수 없고 주인과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우리 주님도 멍에를 쓰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철저한 순종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아버지 뜻임을 알고 죽음으로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구원해주시고, 내 인생에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고 인류의 희망이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케노시스, 주님의 영성인 것입니다. 즉 주님처럼 묵묵히 순종하고, 주님 뜻에 완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과 떨어지지 않고 모든 것을 함께 하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하고, 하나님 일에 동역하고, 교회 직분에 충성하고... 그것이 우리가 메어야 할 멍에입니다. 벗어서는 안될 멍에,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사명인 것입니다. 주님이 받는 핍박을 같이 받고, 주님이 복음을 전했으니 나도 전하고, 주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으니 나도 그렇게 살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으니 나도 십자가를 지고... 그러면 주님의 생명을 공유하고, 주님의 기쁨을 함께 맛보고, 주님의 승리를 같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오늘은 제가 가운을 입고 어깨에 스톨을 했는데, 이것을 두르는 것은 멍에를 메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내 뜻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 뜻에 따르며,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하겠다는 믿음과 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멍에를 얽매는 것, 부담스러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멍에는 벗어야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야 자유와 안식을 얻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두 멍에를 벗어버리고 일이나 책임에서 자유한다면, 정말 우리에게 자유가 오고 안식이 오는 것이냐? 아닙니다. 멍에를 벗어버린다고 우리에게 자동적으로 안식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어야 즐겁고 행복한 것입니다. 주님 멍에를 메지 않고는 성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멍에를 멜 때 비로소 주님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인격을 배우고, 영성을 배우고... 전북 김제군 금산리에 가면 금산교회라고 있습니다. 이 교회 초창기에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테이트라는 선교사가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마을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예수 믿기로 결심하고 교회생활을 시작합니다. 한 명은 당시 그 마을 유지요 재력가요 한학자로 이름을 떨치던 조덕삼 씨입니다. 또 다른 한 명은 조덕삼 씨 집에서 마부로 머슴 생활하던 이자익이라는 사람입니다. 양반과 머슴이 함께 교회생활을 한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교회가 성장해서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장로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머슴인 이자익은 피택됐는데, 양반이던 조덕삼은 떨어졌습니다. 주인이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질투심이 생길까? 그런데 조덕삼은 머슴 이자익이 훌륭하다고 높이며 잘 도와서 교회를 섬겼습니다. 자기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해 이 조덕삼도 장로로 피택되어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조덕삼은 자기 집 종인 이자익을 선임 장로로 섬기며 교회를 잘 섬겼다는 것입니다. 후에 조덕삼은 자기 돈으로 이자익을 신학공부를 시킵니다. 목사가 되도록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신학공부를 마친 이자익은 목사가 되어 한국 교회사에 큰일을 감당했습니다. 머슴이 목사가 되어 사명을 감당한 것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자기 집 머슴을 장로로 섬기며 교회를 섬기고, 후에는 머슴을 목사로 만든 조덕삼 장로의 모습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가문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이 조덕삼씨 손주가 바로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세형 장로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이런 분이 많아야 합니다. 이렇게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감당할 때, 그것이 은혜가 되고, 열매가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행복한 교회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교회는 물론 당시 사회에 얼마나 도전이 되고 영적 두려움을 주었겠습니까? 이 두 분을 통해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성악을 전공하는 어느 음악가의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이 소프라노 음역을 가진 크리스천 청년이 미국 유학 중이었습니다. 주임 교수 밑에서 지도를 받는데, 그 교수 말이 교회에 가는 것은 좋은데, 성가대를 하지 말라고 하더랍니다. 찬송가와 같은, 음역이 낮은 노래를 부르면 다듬었던 목소리를 버리게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유명해지려면 교수 지시대로 따라야 하겠는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 형제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받은지라, 고민 고민하다가 결국 그 지도교수 밑에서 지도를 못 받을지라도, 나는 사명을 포기할 수 없다... 성가대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이 내 사명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 교수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없다 해도 주일에 성가대에서 찬송을 부르지 말라는 것은 수용할 수 없습니다” 결국 교수와는 헤어졌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눈물이 나더랍니다. 마음에 갈등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된 지위였지만,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사람이 되었는데...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스스로를 말씀으로 위로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부흥집회 때 특송 순서를 맡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불렀던 감정과는 다르게 신앙적 고백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눈물이 나는 것을 참아가면서 은혜 감격 속에 불렀습니다. 온 회중이 눈물바다가 되고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그에게 전화 한 통이 왔습니다. 내용인즉, 전에 지도 받았던 교수보다 더 명성이 높은 교수로부터 한번 보자는 청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 교수 밑에서 다시 지도를 받아 유명한 오페라 가수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자기 명성을 위해 예수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고난과 핍박을 감사하며 사명에 순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마음을 가지고 전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케노시스 영성을 가진 자요, 오늘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케노시스 영성... 이것이 주님 멍에를 메고 묵묵히 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금년 한해 표어대로 ‘케노시스 영성으로’ 반응하고 행동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은혜가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케노시스 영성은 겸비하여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 것입니다. 케노시스는 겸비하여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삼위일체적으로 고백하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자기를 비워 사람이 되셨고 종이 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땅에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역사 안에 오셨다, 우리 인간과 대화적 관계를 이루셨다, 혹은 인간 문화의 옷을 입고 오셨다... 설명의 방법이 다를 뿐 모두 같은 이야기입니다. 결론은 당신을 완전히 비우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자기 비움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 버리고 따라나섰습니다. 배도 아버지도 그물도 다 버렸습니다. 대단한 결단이고 자기부정이고 자기 비움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합니다. 완전히 비우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주님 십자가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배신하고 주님을 떠나는 자들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자신을 완전히 비운 후에야 완전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부흥의 주역이 되고 마지막은 주님과 같이 순교의 제물이 되지 않았습니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예수님을 자기 무덤에 장사 지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앞날에 상당한 불이익이 주어질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각오하고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이는 자신을 송두리째 비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 교부 폴리캅은 화형장에 끌려갔습니다. 로마 황제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잠시 후 화형에 처해질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로마 황제는 폴리캅 친구를 시켜 마지막이라도 순종하면 화형이 면제되니 순간만 모면하라고 회유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켜보고 숨을 죽이고 있는 그 순간, 폴리캅은 주님은 지금까지 나에게 서운한 말씀 한마디도 하신 일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주님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의연하게 화형에 처해집니다. 여러분, 우리는 케노시스, 예수님 비움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손에 쥐고서는 안됩니다. 움켜쥐면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은 다 버리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구간으로 인간의 옷을 입고, 목수 아들로, 시골 처녀의 몸을 통해 오셨습니다. 오셔서 수모를 당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얼마든지 죽음을 모면하고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 포기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왜냐면 다 비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비움의 영성을 본받아야 합니다. 거기서 인내가 나오고 순종이 나오고 사랑과 헌신이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너무 부자입니다. 내가 너무 많이 살아 있습니다. 자존심이 그대로 살아있어 때로 우리 자신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우리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분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비워야 한다는 말은 내 안에 있는 자아를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내가 예수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삶은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이 비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으려면 죽어야 합니다. 부활도 죽어야 가능합니다.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욕망을 죽여야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옛날 궁중에서 내시를 뽑을 때 먼저 남성 기능부터 죽였습니다. 그러면 주변의 여성들이 많아도 유혹이 없습니다. 죽으면 유혹이 없습니다. 그러면 유혹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온갖 유혹으로부터, 시험으로부터, 돈으로부터,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많은 폭도에 방해와 핍박이 있었지만 비움의 영성, 케노시스 영성으로 승리한 분입니다. 결국 후에는 이 폭도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감리교회 처음 설교자들은 총회로 모일 때마다 “우리가 아직 살아 있네요” 이렇게 인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겸손함의 승리를 노래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나를 완전히 비우는 케노시스 영성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일터와 학원에서도 나를 비우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내 자아가 살아 있으면 하나되지 못하고 평화할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나를 비우고 그 안에 예수로 채우셔서, 2012년, 영적으로 더 성장하고 가정도 일터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 안에 예수님의 영성, 케노시스로 채워진다면 성숙한 예수 제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은 희망이 있고, 그리고 그것이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고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시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김의 삶을 사셨으며, 마침내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시고, 인류 구원의 희망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2012년, 예수님의 영성, 케노시스 영성으로 희망을 주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믿음으로 출발하라 (마가복음 5 : 25-34) 12.01.25 다음글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누가복음 2 : 8-14)12.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