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2011.11.27. 주일낮예배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고린도후서 6 : 4-10)
김은미 댓글 0건 조회 6,977회 작성일 2011-12-12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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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7.주일낮예배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고린도후서 6 : 4-10

뭐든지 준비된 사람은 여유가 있습니다. 시험을 잘 준비한 학생은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학생은 부담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준비된 사람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담대합니다. 여유가 있습니다. 평안과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으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는 자요,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작은 고난 앞에서도 불안합니다. 상황 앞에서 떠밀려가고, 포기하고 희망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우리는 늘 내가 믿음 안에 있는가? 점검하고 믿음 안에서 살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믿는 자가 되셔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여유가 있고 당당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이 시간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인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을 주제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성경을 보는 관점의 차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관점이 전혀 다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믿음의 사람은 영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성경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자는 성경을 구원의 책으로, 축복의 책으로, 위로와 유익의 책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임을 믿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성경을 부담과 심판의 책으로, 허무맹랑한 책으로 생각하고 폄하합니다. 성경이 요구하고 원하는 것을 구속으로 생각합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세워진 나라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성경 위에 세운 나라입니다. 그래서 대통령도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합니다. 대통령도 성경보다 아래에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미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세상을 올바로 다스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올바른 인격, 올바른 국가, 올바른 생애, 올바른 삶은 오직 말씀대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타락한 문화가 미국 전역을 휩쓸기 시작한 때가 언제입니까? 미국을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존 F 케네디 대통령 때부터라고 합니다. 물론 케네디 대통령은 천재적인 두뇌로 미국 자연과학분야를 세계적으로 확립한 공로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케네디의 결정적 잘못은 성경을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전국 국립학교에서 성경공부 시간을 없애고, 예배 시간을 없앴습니다. 성경시간을 부담스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 대신 자연과학 시간을 늘립니다. 그러나 자연과학 발달이 결코 영적발달에 도움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영향을 받고 자란 학생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보다는 퇴폐적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인본주의, 과학만능주의, 무신론주의가 문화를 지배하면서 오히려 미국은 위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 또한 임기를 마치기도 전에 암살당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시편 103편 10절에 보면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의 특징이 뭡니까? 말씀을 거역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거역하면 사망, 흑암, 곤고, 쇠사슬, 이 네 가지에 매인다는 것입니다.

오늘 청소년 세례식이 있습니다.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학교 공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일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며 말씀 듣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하고 축복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평생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며, 여러분 인생의 표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에게 성경이 주는 의미는 뭡니까? 왜 믿음이 있는 자는 성경을 최고 가치 기준으로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① 성경은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학문이 있지만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어떤 철학과 어떤 종교도 인간 구원의 길에 대해 확실하게 대답하는 책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명식이라는 스님이 14년간 절에서 법사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대생으로부터 불교는 수양을 닦기 위해 사람이 만든 종교고,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죄인을 구원해 주신 참 종교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기독교를 공박하고 불교를 옹호할 생각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무려 70독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성령이 역사하여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절을 떠나 신학을 하고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세상 지식은 인간 영혼을 결코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 가는 안내도를 보여줍니다.

② 말씀은 인생의 나침반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늘 밝은 대낮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어두운 인생을 밝혀주는 등불이요, 빛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생을 성공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학생은 공부할 수 있는 지혜가 떠오릅니다. 가정과 사업장 실패 원인이 진단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이 주시는 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③ 말씀은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비로운 것은 성경을 읽을 때 주님께서 내 믿음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더 확실하게 체험됩니다. 그래서 내 모든 환경도 바꾸어 주시고 무지와 가난과 고통을 은혜가 넘치는 삶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④ 말씀은 순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2편 6절,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말씀이 순결하므로 성경을 읽을 때 순결한 심령으로 바뀝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더러워지고 악해집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더러움을 씻어내고, 악한 것을 교정해줍니다. 이처럼 성경은 축복이 약속된 책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1장 3절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는 자에게는 축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시간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말씀이 여러분의 믿음의 뿌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영이 살고, 인생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인생을 승리로 이끌어가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또 한 가지 큰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 성전을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전에 나오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체험하는 축복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교회를 구속의 기관, 무익한 기관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조롱과 멸시의 잣대로 바라보고 박해합니다. 그러나 개인이든 나라든 교회를 멸시할 때 얼마나 큰 고난이 임했습니까? 교회를 멸시한 나라가 이 지상에서 잘 된 일이 없습니다.

북한이 6.25전에는 남한보다 더 잘 살았습니다. 좋고 큰 교회, 신학교, 목사님들이 모두 북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6.25가 터지자, 북한에 있던 교인들이 남한으로 모두 내려와 버렸습니다. 예수 잘 믿으려고 모두 내려온 것입니다. 그 결과 북한이 안 되기 시작하고 지상에서 제일 저주받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떠나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소련 공산주의를 세운 스탈린은 원래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유아세례까지 받았습니다. 성경공부도 많이 했고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성경을 늘 읽어주고 신학교까지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신학교 졸업반 때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나면서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마침내 공산주의를 창설해서 기독교를 말살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람 2천만 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교회를 떠나면 사탄이 장악하여 마귀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떠나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관, 우주관, 물질관, 행복관은 결국 허무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 없이 돈 많이 벌고, 좋은 직장, 좋은 집을 가져도 행복하질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경외하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두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디에서나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믿음 있는 사람은 교회를 가치 있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갑니까?

① 교회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축복의 통로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 존귀하게 되고, 축복의 주인공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② 교회는 우리 영적인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창조주 하나님의 품안에서 쉼을 누리는 곳입니다. 성경은 “지존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③ 교회는 영혼의 양식을 공급받는 곳입니다.

교회에 오면 영혼의 양식을 공급받게 됩니다. 영혼의 양식은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세계적인 작품을 수 없이 남긴 사람입니다. 그의 작품의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길 ‘나는 주일날에 한 번도 교회에 빠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양식을 공급받고 지혜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는 곳입니다.

오늘 세례 받는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교회가 여러분의 신앙이 자라고 열매를 맺고 풍성하게 하는 축복의 장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 나올 때마다 여러분의 영이 쉼을 얻고 더 풍성함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교회가 여러분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곳임을 믿고 신앙생활 교회생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죽음의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가을인가 싶더니 어느새 겨울이 왔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고 창조 질서입니다. 모든 자연은 봄이 오면 새싹이 돋고 여름이 오면 모든 식물들은 충천합니다. 그러다가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고 겨울이 되면 삶을 마감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태어나서 삶을 살고 때가 되면 죽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갑니다.

그런데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많은 차이가 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저주로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불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왜냐면 죽음의 의미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종말이 올 때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죽음은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죽음에 대해 아주 초연했습니다. 그래서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값지게 살아간 선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이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의미가 정리되었기 때문입니다.

헬라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친구에게 쓴 편지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을 봤소. 그들의 죽음에는 두려움도 어두움도 없었소. 평안한 아낙과 잔잔한 미소를 봤소. 나는 그들 장례식을 봤소. 마치 혼인하러 가는 사람을 환송하듯 소망과 찬송을 부르며 에스코트 하듯 죽은 사람을 하나님께 떠나보내는 것을 보고 많은 도전을 받았소”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갑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로 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하고는 죽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 얼굴로 바뀌고, 자기를 저주하고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천국을 봤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개의치 않고 도리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의미를 바로 안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가 분명한 사람은 죽음을 유익하게 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보면,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아무에게나 죽음이 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주 안에 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 안에서 죽는 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까?

① 죽음은 우리를 영원한 자유인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인 자유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온전한 자유인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죄악의 영향권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사탄의 시험과 세상의 유혹이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음에도 우리는 마음껏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죽음은 죄가 없는 상태, 죄를 지을 수 없는 그런 상황으로 이전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완전한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을 유익하다고 한 것입니다.

② 죽음은 그리스도인을 신령한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이 죽고 부활했을 때 예수님과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죄로 일그러진 모습은 볼 수가 없고. 죄와 상관 없는 영화로운 몸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③ 죽음은 완전한 천국의 시민이 되게 합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천국의 특징이 뭡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등을 삼고 거기는 배고픔도 목마름도 없다고 했습니다. 눈물도 질병도 슬픔도 없는 곳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천국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은 우리를 영원한 자유인이 되게 합니다.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영광스러운 천국 시민이 되게 합니다. 신령한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에 대한 신앙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기본적인 문제 세 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① 그 하나는 구원의 문제를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죽으면 천국 갈 수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준비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혼인잔치 비유는 주님 재림 때 이야기입니다. 준비된 사람들은 갑자기 신랑이 왔어도 침착하게 맞이했습니다.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은 잠을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기름을 찾아 허둥댑니다. 그러는 사이 문은 닫히고 버려짐을 받았습니다.

② 둘째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물으셨을 때 대답할 내용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최고 기업인 어느 그룹의 창립자는 세상을 떠나기 전, 담당 의료진에게 이렇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저를 일 년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나는 지금까지 돈을 모으는 데만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래서 돈을 모아 성공을 했지만, 돈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이렇게 죽게 되었습니다. 일 년만 더 살게 해 준다면 내 재산 절반을 주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마지막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한 줌 흙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나를 위하여 의의면류관이 준비되었다”고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③ 세 번째로 자손들에게 영적으로 무엇을 유언으로 남기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질적인 유산을 남기는 문제가 아니라 영적으로 무엇인가 교훈적인 대답을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성도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죽음 뒤에는 예수님이 예비해 놓으신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영광스러운 천국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욕하고, 외면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무슨 재미로 믿느냐, 짧은 인생을 왜 예수에게 매여 사느냐고 하면서 놀고, 취하고 자기 마음껏 살아갑니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종지부를 찍을 날이 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임종의 순간입니다. 누구든지 죽음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누구든 죽음은 반드시 맞이하게 됩니다. 그 죽음의 순간에 인간은 두 갈래 길로 갈라집니다. 예수님을 외면했던 사람들은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고, 예수님을 믿고 산 사람은 천국 길로 가는 축복과 영광의 들어가게 됩니다. 결코 인생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죽은 뒤에 갈 길이 엄연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성경을 주신 이유도, 교회를 주신 이유도 오직 예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고 승리하라고, 이 땅에서 승리의 삶을 살다가 영광중에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받으라고... 그래서 어떤 환경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오늘 세례 받는 여러분, 오직 예수,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통해, 교회 생활을 통해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부터 강림절이 시작됩니다. 강림절, 우리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절기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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