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2011.11.06. 주일낮예배 "너희가 나눠주어라" (마가복음 6 : 34-44)
김은미 댓글 0건 조회 6,983회 작성일 2011-12-1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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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6.주일낮예배

너희가 나눠주어라

마가복음 6 : 34-44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배를 타고 한적한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기도도 하고, 휴식도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는 군중들은 예수님 배를 알아보고 예수님 일행보다 먼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영의 양식에 굶주려 있던 영혼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먹이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 무엇을 사먹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그러자 제자들이 “어떻게 2백 데나리온 어치 떡을 먹일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1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으니 2백 데나리온을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약 천만원 정도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반문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알아보고 와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고 보고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드린 후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함께 먹은 숫자가 남자 어른만 5천 명,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약 2만 명이 배불리 먹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대하면서 그냥 지나쳐서는 안될 대목이 있습니다. 37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 있습니다. 본문 37절 말씀이 그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아셨습니다. 그들 수중에 단 몇 푼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가 먹을 것을 좀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귀한 영적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너희가 나눠 주어라” 이 말씀이 주는 영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주린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라는 긍휼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눠주어라” 이는 무리를 향한 사랑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양은 무지합니다. 목자가 없으면 쉽게 길을 잃어버리고, 또 늑대나 이리에게 쉽게 먹히고 맙니다. 그래서 목자 없는 양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양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몹시 어려운 시대에 살았습니다. 악한 헤롯 왕과 로마의 강압적인 통치 밑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많았으나 대부분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결국 백성들은 육신적으로도 고난 받고, 영적으로도 가난한 상태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의 심정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귀찮게 여겼습니다. ‘지금 내 몸도 피곤한데 어떻게 저들을 돌보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장 힘들고 괴로워도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몫이요 이 땅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오늘 역사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또 하나의 사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배고프고, 병들고, 전쟁에 시달리며, 인종적 핍박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 광야와 같습니다. 날이 저물어도 먹을 것이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처럼...

한 기관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 중 가난 때문에 죽는 사람이 평균 매 시간 2천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북한만 하더라도 어떻습니까?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태반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직도 그늘진 곳에서는 굶주림과 싸우고 있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길 때, 나누어주는 사랑이 있을 때, 언제나 기적적인 역사는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20세기 초 미국 역사에 경이로운 기록을 가진 시장이 있습니다. ‘라 과디아’라는 뉴욕 시장입니다. 이 분은 당시 시민들에게 어찌나 신망이 깊었던지, 뉴욕 시장으로 세 번이나 연임을 했습니다. 게다가 사후에는 그 정신을 기리고자 공항이름을 ‘라 과디아’ 공항으로 정하기도 했습니다.

이 분이 시장이 되기 전, 판사로 재직 중일 때 일입니다.

어느 날 한 노인이 재판을 받으러 왔는데, 빵을 훔쳤다는 이유였습니다. 훔친 이유를 묻자, 그 노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합니다. “사흘이나 굶어 너무 배가 고파서 남의 빵에 손을 댔습니다”

그 말을 들은 판사는 “당신의 죄는 벌금 10불에 해당합니다”

그리고는 즉시 지갑에서 10불을 꺼내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렇게 배고픈 사람이 뉴욕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나는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입니다”

그 노인의 벌금을 대신 내준 것입니다. 게다가 모자를 벗어 돌리게 하면서 “이 노인 분은 이곳을 나가면 다시 남의 것을 훔치게 될 테니, 자신처럼 잘 먹은데 대해 벌금을 내고 싶으면 모자에 넣으라고 합니다. 재판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돈을 모으고, 그 노인은 마음에 큰 용기와 힘을 얻고 재판장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고,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고, 목마른 자에게 물 한 컵 줄 수 있는 사람을 양과 같은 자요 천국에 앉을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살아갈 때 넘치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을 보세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갈라디아서 6장 7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전 연세대 총장 박대선 목사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외국에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한 유학생이 추운 겨울인데도 신이 없어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 자기가 신고 있던 신을 한 켤레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지나 귀국했고 6.25가 터졌습니다. 양식이 없어 쫄쫄 굶고 있었습니다. 당시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이때 한 사람이 쌀 몇 가마니를 싣고 왔습니다. 알고 보니 수년전 신을 준 사람으로, 그가 유학에서 돌아와 성공적인 사업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자기만의 삶의 울타리를 헐어버리고,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무엇인가 줄 수 있는 아버지 속성을 닮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복을 받는 길이요, 그것이 영원한 진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이 땅에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고통당하는 자들을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손이 되어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 사랑을 심고, 그 속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믿음이 능력임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5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돈이 없음을 잘 아셨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다섯 명을 먹일 돈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나눠주라” 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해진다’ 는 믿음을 심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수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귀신들린 자가 자유케 되며,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깨끗이 낫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 손이 스치고, 말씀이 닿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전혀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쉽게 포기해 버리고,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9장 13절에 보면, 그들의 믿음 없음이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현실을 바라보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계산만 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들은 오천명 앞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바라보고 운명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무리를 오십 명씩 백 명씩 앉게 하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를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제자들에게 불가능이 없는 믿음의 능력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상황만 생각하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래서 부정적이 되고 운명적이 되고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뭡니까? 믿음이란 나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전능자를 붙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위기에 부딪히면 위기에, 사건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위기보다 뛰어나신 하나님을 발견하면 위기는 쉽게 지나갑니다. 그래서 홍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믿음이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 섰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보고 두려워했고, 모세는 하나님을 보고 안심했습니다.

난공불락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았습니다. 7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 돌았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 소리쳤습니다. 그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군사력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지혜와 철학과 능력으로 무너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고 그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이처럼 믿음이란 나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만 있으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어려운 현실은 오히려 믿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곽규석씨와 구봉서씨는 유명한 코미디언이며 절친한 친구입니다. 그런데 곽규석 씨가 먼저 예수님을 믿음으로 삶의 즐거움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축복을 친구인 구봉서 씨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소귀에 경 읽기처럼, 도무지 듣지를 않는 겁니다. 결국 그의 아내를 설득해 구봉서씨 집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구봉서씨가 집에 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화를 냈지만 워낙 성경 공부하는 분위기가 진지한지라, 막거나 방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데 일찍 들어오는 날은 안방에서 성경공부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추운 건넌방에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너무 추워 견딜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공부하는 안방으로 들어가 난 좀 누워야겠다고 하고는 윗목에 누워 성경공부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웃음이 나고 그 사람 정력도 좋다... 하고 속으로 빈정거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물을 씻으며 예수님 말씀을 듣다가 사로잡힌 것처럼 그의 마음은 서서히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가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그때 구봉서씨는 교통사고를 당해 다친 다리가 다시 재발해서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고통을 이기기 위해 진통제로 아편을 투약하다가 점점 약물 중독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남편에게 울면서 예수님을 믿고 안수기도를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워낙 아프기도 했고, 그동안 들은 말씀도 있어서 그의 마음은 서서히 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못해 허락을 합니다.

그런데 아내는 그에게 당신이 간절하게 사모하고 믿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 없으니 깊이 사모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막다른 길목에서 구봉서씨는 주님의 능력을 사모하게 되었고 안수기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기도 받고 일주일 후 병마의 고통이 사라지게 되면서 아편을 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편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던 그가 아편으로부터 자유해진 것입니다. 이 놀라운 능력에 거꾸러져 그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결국 연예인교회 장로까지 되어 주님을 섬기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들어가니 고난이 오히려 축복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 영혼도, 육체도, 인생도 구원받는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보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면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가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믿음의 역사를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낙심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속상하고, 그래서 결국 신앙도 잃어버리고, 사명도 축복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제자들 믿음을 회복시키시고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가 나눠 주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믿음만 가지면 이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있다’ 는 말입니다. 너희가 믿음만 가지면 어떤 고난과 환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자신의 손으로 떡과 물고기를 나눠 주면서 믿음의 역사를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가 산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을 가져야 이 땅에서 승리하고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일을 주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행하셔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큰 역사를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부담감이라는 말은 그리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왠지 무겁고 사람을 힘들게 할 것 같고, 부담감보다는 편한 게 좋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편하게 신앙생활 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이 부담감을 갖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것을 바라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부담감은 때로는 소중한 것이기도 합니다.

6.25당시 어떤 사람이 전쟁 고아들의 비참한 모습을 미국 상류층 사교 클럽에 공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 와 있던 홀트 부부가 그 영상을 보며 동정심을 느끼고는 얼마의 돈을 기부했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도 그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귀에 맴도는 것입니다. 배가 볼룩한 아이들이 빈 밥그릇을 들고 두드려대던 모습이 아무리 잊으려해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홀트 부부는 한국 땅에 와서 그 현장을 보고 미국으로 돌아가, 몇명 아이들을 입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마음이 편해지겠지 생각했는데, 계속해서 한국에 두고 온 아이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더라는 것입니다. 밤에는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우는 아이들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결국 다시 한국에 들어와 아이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이렇게 수 십명 아이들을 키우기 시작하다가 오늘의 홀트 아동복지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부담감이 이 땅의 많은 전쟁고아들에게 꿈이 되고, 희망이 된 것입니다.

이런 홀트 부부의 부담감은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고, 사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지금도 그의 딸 홀트 마리가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룩한 부담감을 본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문 36절에 보면 제자들은 “무리로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무리들이 각자 알아서 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가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족하지만 양무리의 목자요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지도자로서 무리들에 대해 책임감을 갖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지도자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는 먹고 살기 힘들다고 자녀들에게 각자 알아서 먹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모는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들에 대해 책임을 지고 먹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 지도자는 아무리 자신의 형편이 힘들지라도, 양무리를 먹여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책임감, 한국에 대한 책임감, 이 시대에 대한 책임감, 열방에 대한 책임감... 이런 책임감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늘 이 시대 영적 지도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 있든지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더를 보세요. 그는 포로 신분이지만 왕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만이라는 사람의 흉계로 유대인들이 멸절당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사촌 모르드개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요청합니다. 민족을 하만의 손에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왕의 부름 없이 왕에게 나가는 것은 죽어야 하는 왕궁 법도가 있었습니다. 에스더는 이런 사실 앞에 주저하게 됩니다.

여러분, 에스더는 성공한 여인입니다. 이방나라에 포로로 와서 왕비 이상으로 어떻게 성공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그 성공을 그대로 누리려고만 했다면 그의 삶의 자리는 스스로 높은 권세를 누리고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하는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그런 성공의 자리에서 목숨을 내어 놓는 일을 하게 됩니다. 왕궁의 규례를 어기고 죽으면 죽으리이다 각오하고 왕 앞에 나아갑니다. 결국 그 거룩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민족을 구하는 기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지난해 미 포브스 지가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로 오프라 윈프리를 뽑았습니다. 그가 한 번 책을 추천하기만 하면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광우병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을 때 “이제는 햄버거를 먹지 말아야겠습니다” 한 마디 한 것이 미국 전역 햄버거 매출에 엄청난 타격을 주어 축산업이 도산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윈프리는 아픔이 있는 여성입니다. 1954년 사생아로 태어나 외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손을 전전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물 속에서도 성경을 매일 암송하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다른 책들도 틈만 나면 열심히 읽었습니다. 슬픔과 외로움을 독서로 달랬습니다. 이런 윈프리를 선생님은 장학생으로 추천하여 주었고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런 인생 여정을 살아온 윈프리는 사명을 네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 무엇이든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은 사명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 일을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둘째, 부담감이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담감을 주시는 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고아들만 보면 부담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고아들을 향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 아픔이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아픔을 주셨다면 그것은 사명입니다. 그 아픔을 통해 같은 아픔을 지닌 사람들을 위로하고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넷째, 가슴 설렘이 사명입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 설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미치도록 좋은 것이 사명입니다.

여러분, 거룩한 부담감은 우리 사명입니다. 부담을 받아들이면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사명이 되면 하나님은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왜냐면 그 사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주 토요일 사랑나누기 바자회가 있습니다.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시작한 바자회가 어느덧 21년이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우리 교회도 참 힘들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 영혼과 지역사회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사명이 되었고, 하나님이 힘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나 감사하고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동안 사랑나누기를 통해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무의탁 노인과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어려운 학생들에게 급식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비전하우스 지역아동센터를 적극 활용해서 이를 확대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부담감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담감이 있어야 나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부담감을 가진다는 것은 나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능력이 없으면 부담감도 없습니다. 힘이 없으면 부담감도 없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부담감도 없습니다. 부담감이 없는 곳에는 책임감도 없고, 나와는 상관없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 굶주리고, 상처입고, 낙심하여 어려움을 당한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사랑을 베푸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고통을 보며 거룩한 책임감을 느끼는 마음...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우리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부담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는 성도들, 교회 안에서 느끼는 부담감은 기쁨으로 순종함으로 받아들여서 거룩한 부담감으로 승화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이번 사랑나누기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베비 힐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미군이 이태리에 주둔하고 있을 때, 그는 열 세살이었습니다. 그는 미 공군상사의 아들이었는데, 슈바이처 박사에 대한 책을 읽다가 감명을 받아 미공군 사령관 린제이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작은 아스피린 한 병을 소포로 보내면서 “이것을 낙하산으로 아프리카에 있는 슈바이처 박사에게 보내 불쌍한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부탁했습니다.

이것이 방송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소문이 나서 사방에서 돈이 모금되었는데 40만불이 모였습니다. 이 돈으로 의약품을 사서 슈바이처 박사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비록 적은 것이지만 하나님 손에 드려질 때 엄청난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으로 행동하는 헌신이 있을 때 기적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시대가 무척 어렵습니다. 믿는 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눠주어라” 하시는 주님의 명령이 있는 한 우리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신성한 의무를 다해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이루고, 이 땅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는 포도원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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