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2009.07.12. 주일낮예배 "거듭난 자의 영성 "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153회 작성일 2011-12-08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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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7.12.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2 : 20-21  "거듭난 자의 영성"


요즘 감동을 주는 영화가 있는데, <창끝>이라고 하는 선교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에콰도르 아마존 정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우카(사나운)라고 알려진 와오다니 부족에게 살해당한 다섯명 선교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와오다니 부족은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부족으로 그 잔인함이 유명한 부족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두가지 습성이 있었는데, 하나는 이방인을 잡아 사지를 토막내어 죽이는 습성이고, 또 하나는 배신하는 습성입니다. 이들은 호의적이다가도 순간 배신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했고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타 부족과의 빈번한 '창 싸움'으로 부족이 멸종위기까지 겪을 정도였으니 그 포악함은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다섯 명의 선교사들은 달랐습니다. 서른도 채 안된 젊은 다섯 명 선교사들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오직 영혼 구원"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 부족에게 가는 것을 꺼려했지만, 그들은 6년이 넘는 동안 "하나님 우리 생명을 취하소서. 주님 것이기에 사용하소서."라는 기도와 함께 와오다니 부족 선교를 위해 준비합니다.
경비행기를 타고 3개월 간 식료품과 의약품을 전달하며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면서 "주님"을 외치던 그들. 그러나 어느 순간 변해버린 와오다니 부족은 그들 가슴에 창끝을 겨루고 맙니다.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부아 비아 우늠부아"(나는 당신의 친구입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고 최후를 맞은 5명의 선교사들...
세상 모두가 "불필요한 죽음"이라고 그들을 비난했습니다. "바보"라고 "쓸모없는 낭비"라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아내와 자녀들은 남편을 아버지를 죽인 와오다니로 가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며 헌신합니다. 이들의 헌신을 통해 창끝을 겨누며 사지를 잡아 토막내 죽이는 습성을 가진 이 부족이 놀랍게도 폭력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살인빈도는 90%이상 낮아지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36년 후 1992년 6월, 와오다니 외딴 지역에서는 신양성경 봉헌예배가 드려졌습니다. 75명 와오다니 원주민 기독교신자와 수명의 성경번역 선교사들이 모여서 와오다니 언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봉헌예배에 참석한 세 명 와오다니 사람은 36년 전 다섯 명 선교사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바로 그 아우카였습니다.
왜 젊은 선교사 다섯 명의 피가 와오다니에 뿌려져야 했는가? 세상은 '헛된 죽음'이라며 그들의 죽음을 비웃었지만 그들의 뜨거운 피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어둠 속에서 헤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야 한다는 메아리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거듭난 자의 신앙이라고 하는 거,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영성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세상도 그 사람을 통해 감동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하는 거,
오늘 본문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감동을 주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이 나오기까지는 그리스도인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고 있었습니다(12절). 그때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그곳으로 다가옵니다. 베드로는 놀라서 그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을 비난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울이 베드로의 이런 행동을 보고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행동은 성도들에게 신앙적인 혼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장 15절, 16절에서 구원에 대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행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 구원이 율법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못박은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예수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분명한 신앙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난 자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듭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 우리는 하나님 형상, 모양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형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눈에 보이는 형상이나 모양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떤 형상이나 모양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즉 형상은 하나님 속성, 하나님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 성품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땅 모든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타락함으로 이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속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 성품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재창조라고 하고, 다시 태어난다, 거듭남, 중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한 사람, 즉 거듭난 사람은 자동적으로 사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거듭난 자는 이 땅에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천국을 향해 성화의 삶, 순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거듭난 자의 삶이요, 영성이라고 하는 거,
여러분, 이시간 거듭난 자의 영성을 사모하시고 거듭난 자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거듭난 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떤 영성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며 세상에서 인정받는 삶,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3가지로 나눠봤습니다.

첫째, 내 몫을 인정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말씀 원문을 직역해 보면 “나는 산다. 그러나 내가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면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 실존자체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요 새 사람이라고 하는 거,
거듭나기 전에 우리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내 뜻대로, 내 이익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방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경험을 하게 되면, 바로 이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것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 감정의 변화와 더불어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사명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창끝 영화의 주인공 다섯 명의 선교사들도 모두들 다 무모한 일이다, 바보와 같은 일이라고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 일이었기에, 사명이었기에 생명도 아낌없이 드릴 수 있었던 것처럼... 결국 어둠의 땅에 하나님의 빛을 전하여지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은 삶의 극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1741년 파산했고, 감옥에 들어갈 처지가 됐습니다. 그 화려했던 삶이 하루아침에 끝이 난 것입니다. 급기야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런 인생 사망의 골짜기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변화하여 새사람이 됩니다. 그 이후 그는 세상 군왕을 위해 작곡하고 자기 명예를 위해 연주하던 삶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음악만을 작곡하고 연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만들게 된 음악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 삶의 몫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가지고 태어났고, 그 목표를 향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인 되실 때, 그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고, 그 목표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이 거듭난 자의 삶이라고 하는 거, 이런 높은 자존감이 여러분에게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일본 동경 옆에 오차노미아란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오뎅으로 유명한 집이 있습니다. 얼마나 유명한 집인지, 그 집 오뎅을 먹으러 전국에서 찾아온다고 합니다. 특히 오뎅국물이 맛있다고 하는데,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 집은 3대를 내려오면서 오뎅집을 경영하는 집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동안에 오뎅국물 만드는 불을 한번도 꺼뜨린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3대를 오뎅집을 경영하면서 한번도 불을 꺼뜨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오뎅국물을 끓이는데, 한 사람이 자리를 뜨지 않고 기름을 걷어내며 정성을 들여 끓여 놓고 새벽에 퇴근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국물로 하루 종일 오뎅을 만들어 판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100여년을 쉬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뎅 맛을 내기 위해 사는 사람들” 입니다. 그래서 성공을 했고, 이름을 냈고,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명의 삶입니다. 얼마나 긍지와 자존감 있는 모습입니까? 우리도 주님 주신 사명을 위해 이런 긍지와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부정하고 회피하고 포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자꾸만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벗어나고 포기하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 정체성까지 부정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목적을 잃어버리고 표류하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언행을 함부로 하고, 세상을 쉽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높은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을 지켜냅니다. 값싼 유혹에 넘어가도록 자신을 방치하지 않으며,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시련이 와도 결국에는 넉넉하게 승리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존감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어떤 핍박과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능력을 자랑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한 고별설교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이 고백에서 세 가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①나는 “복음” 때문에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 ②나는 “복음” 때문에 산다. ③나는 “복음” 때문에 죽을 수 있다. 바울은 복음전하는 일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환난이 오고 핍박이 와도 흔들림 없이 그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거듭난 자의 삶이요, 영성이라고 하는 거, 여러분도 거듭난 자로서 자존감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이 세상에서 나만의 몫, 사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멋지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인생, 그것이 여러분 영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십자가가 내용이 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고백을 통해 구원받은 이후에 자기 삶이 십자가를 중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 마음으로 바라보고, 나아가 예수님 때문에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듭난 사람은 십자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보고, 예수님 마음으로 삶의 맛과 향기를 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중국 지하교회에서는 새로운 신자들을 환영할 때 이렇게 말해준다고 합니다.
"지금 당신은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두 눈, 들을 수 있는 새로운 두 귀, 도울 수 있은 새로운 두 손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하나의 심장을 가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모든 것을 예수님의 눈으로 보고, 예수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거,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에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늘 보는 눈으로 보았고, 가끔씩 구걸하는 그에게 동전을 던져주곤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기 위해 그곳을 지나다닐 때마다 보았던 그는 그냥 거지요, 앉은뱅이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후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이제까지 봐왔던 그 앉은뱅이는 더 이상 버려진 자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영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 다가가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는 단지 베드로와 요한의 기적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거듭난 사람이 어떤 눈과 마음으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아야 하는가 보여주는 사건이요 교훈인 것입니다.
이런 예수의 마음과 눈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필요를 나누고 도와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눈과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신앙인들이 이 영성을 많이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굳어진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세상 방식대로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때 어린아이들을 가진 어머니들이 예수님께 안수받기 위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을 비롯해 어른들은 그들을 제지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천국은 이러한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어린아이들을 안으시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이렇게 다릅니다. 나는 어린아이와 같이 내 중심으로 생각하지만 주님은 아버지 마음으로, 하늘나라 마음으로, 십자가 사랑과 정신으로 보고 생각하고 행하신다고 하는 거, 이것을 배우고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거듭난 사람이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거듭난 사람에게는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중 하나가 삶의 방법론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게 되면 사랑으로 용납하고 수용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랑 아닙니까"? 과거에 ‘내 실력으로’ 살았다면, 과거에 ‘내가 가진 것으로’ 살았다면, 과거에 ‘처세술로 살았다면’ 이제는 ‘십자가 은혜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 은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내 중심의 삶을 내려놓고, 십자가가 여러분 삶의 내용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 삶에 결실과 맛이 달라진다고 하는 거,
사도행전 교회를 보세요. 예수살렘 교회는 그리스도로 인해 능욕받는 것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유대인의 핍박이나 로마의 핍박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마음으로, 예수님 생각과 정신으로 저들은 살아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서로 나누고 돕고 섬기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줄 줄 알고, 자기를 희생해서 섬겨줄 줄 아는 아름다운 공동체였습니다.
안디옥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주후 44년부터 5년동안 팔레스틴 지방에 심한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때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힘껏 헌금하여 예루살렘 교회로 보내어 도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능력을 가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십자가 사랑이요, 십자가가 내용이 되는 삶이라고 하는 거, 이런 삶이 거듭난 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맛이 나고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누렸고, 참 평안을 누렸으며, 무엇보다도 능력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더 이상 세상 가치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고, 날마다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삶의 내용이 있을 때 거기에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 영광이 드러난다고 하는 거, 오늘 우리가 이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향해,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곳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십자가가 내용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거듭난 성도가 되어 삶의 영향력과 능력을 나타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열매가 있게 되고, 또한 교회에 유익이 되며 세상에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포도원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며 살자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거듭나면 영원한 천국을 보장받습니다. 우리가 세상풍파에 요동하지 않도록 십자가는 우리를 지켜줍니다. 소망과 구원과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때론 힘들고, 십자가의 삶이 힘들지만 기쁨으로 지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범죄하고 잘못해도 영생,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달걀이 부화되어 병아리가 되었으면 병에 걸려 죽어도 병아리로 죽지 달걀로 되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번데기가 나비가 되면 잘못해서 거미줄에 걸려 죽어도 나비로 죽지 번데기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거듭나면 천국은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성도로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거, 그때 하늘의 축복과 상급이 약속되어 있다고 하는 거,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믿음으로 값없이 받지만, 이 땅에서 축복 받고 하늘나라에서 면류관 받고 상받는 것은 행한 대로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구원 받으면 됐지 하늘의 상이 뭐가 필요하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8절에 가보세요. 우리가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면 너희도 “그대로 받을 줄을 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대로 받는다" 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것을 갚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여기서 ‘상’도 ‘상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장차 받을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힘과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편과 환경가운데서도 이 말씀 붙잡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 하늘 축복을 기대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늘나라 상급을 기대하며 사는 자는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
1) 하늘에 소망에 두고 살아갑니다.
소망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① 하나는 수평적 소망입니다.
이는 세상에 거는 소망, 사람이 사람에게 거는 소망을 뜻합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바울이 로마로 가기 위해 승선한 알렉산드리아라는 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해 도중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났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큰 풍랑은 계속되었습니다. 하늘을 보아도, 땅을 보아도, 바다를 보고, 배를 보아도, 선장과 선주와 기관장과 갑판장을 보아도 살길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나 세상은 소망의 대상이 못된다고 하는 거,
② 다른 하나는 수직적 소망입니다.
수직적 소망이란 아래서 위를 바라보는 소망을 말합니다. 풍랑만난 알렉산드리아호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해도별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바다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바울 일행 276명을 다 살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수직적 소망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에게, 물질에게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때 하늘의 축복을 기대하는 삶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거, 아무쪼록 세상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1세기 교회는 능력 있는 교회, 생명력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소수 사람들이었지만 로마를 복음화 했고 세계를 살려냈습니다. 그러면 그 생명력이 어디서 나왔느냐? 바로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 종말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마라나타" 즉, "주께서 곧 다시 오십니다" 라고 인사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삶은 마지막에 대한 긴박감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오고 고난이 생겨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천국을 소망하며, 하늘 상급을 기대하고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천국을 준비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 주의 일에 더욱 힘쓰며 살아갑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는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됩니다. 왜냐면 그것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 은혜를 보답하는 길이요,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주님 일에 힘쓸때 하나님 상급이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은혜에 감사해서 마땅한 일을 하는 것인데도 주의 일에 힘쓰면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이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과 상급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소망을 가지고, 어떤 고난도, 핍박도 넉넉히 이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이미 예비해 주셨습니다. 아무쪼록 하늘 상급을 기대하며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읽는 성경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매일 성경을 읽지만 세상 사람들은 매일 우리를 읽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면서 교회를 생각하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지금 우리 모습을 보면서 교회와 하나님에 대해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 할 때 맛이 나고, 향기가 나야 합니다. 우리 삶을 보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역시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난 자의 영성이요, 자존심이라고 하는 거,
여러분, 거듭난 자로서 내 몫이 있다는 사명감이 여러분에게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가 삶의 내용이 되며, 하늘 상급을 기대하며 이 땅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무쪼록 거듭난 자의 영성으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 이 땅에 하나님 나라와 의를 확장해가는 포도원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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