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신앙 (누가복음 2 : 25-35) 김은미 댓글 0건 조회 6,884회 작성일 2012-01-25 12:19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2011.12.18.주일낮예배 기다림의 신앙 누가복음 2 : 25-35 <클레멘타인>이라는 미국 서부 민요가 있습니다. 가사는 1848년부터 1855년,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일어난 물질만능(금)을 배경으로 이주해 온 광부가 수해로 딸을 잃어버리고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노래입니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라는 가곡이 있습니다. 이 노래는 침략자 일본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고 삼천리 금수강산 문전옥답을 통째로 빼앗긴 이 나라 백성들이 피눈물을 뿌리며 국경 밖인 만주 땅 북간도로 연해주로 떠나던 시절, 처량한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저항가로 부른 가곡입니다. 해방을 기다리며 부른 노래입니다. 두 가지 다 기다림을 주제로 한 노래입니다. 우리 인생은 기다림의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희망을 잃어버린 인생입니다. 이런 기다림들이 우리 인생을 지탱해주는 희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쉼 없는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성경도 기다림의 책입니다. 어떤 기다림입니까?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를 기다리고, 신약에 약속된 재림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예수님께서 초림하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지배를 받는 식민지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치, 경제 등 생활 모든 부분에서 로마의 억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억울하고 답답한 현실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나라가 일본에 속국이 되었을 때와 같은 처지인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다린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야... 이스라엘 주권을 회복시키고, 빼앗긴 나라를 자유케 할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많은 사람들, 특히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야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일부는 당연히 그런 메시야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에도 그런 환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6절에 보면 승천을 앞둔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지만 성육신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강림절 마지막 주간입니다. 강림절은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는 어떤 분인가? 우리가 만나야 할 메시야는 어떤 분이냐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시므온을 통해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정결례를 위해 성전에 온 아기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는 아기 예수를 안고 축복하며 찬송한 것이 본문 말씀입니다. 그러면 시므온이 만난 예수, 시므온이 고백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첫째,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한 그런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닙니다. 그분은 온 인류를 죄악과 사망의 사슬에서 건져주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본문 30절에 보면,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말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예수님을 보면서 구원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기다립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잘못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기다리는데 혹시 정치적인 메시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을 최고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다가 자꾸만 정치적인 목적을 더합니다. 예수 믿으면 사업이 잘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예수 믿으면 자식들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예수 믿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믿고 난 후에 사업이 잘 될 수 있고, 병도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예수 잘 믿어 자식들이 복을 받아 잘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덤으로 주시는 것이지, 그게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3 비전여행 때 만난 사람 이야기) 여러분, 기적이란 무엇입니까? 불치병을 고쳐주는 것이 기적입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고통가운데 있을 때라도 감사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실패가운데 있을 때도 평안의 은혜를 주십니다. 이것이 보다 큰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쌌습니다.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따르는지, 마가복음 5장에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옷자락을 만져 혈루증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아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때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네 명의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곳도 사람들이 너무 많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14장에도 빈들에 남자 장정만 오천명이 모였다고 했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그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는 무리, 다른 하나는 제자입니다. 예수님 곁에 있다고 다 제자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경험한다고 다 제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까? 그 무리들이 등장하는 사건을 보면 병자가 고침받고,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나고... 즉 기적이 동반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복음서에서 보여주는 무리 모습은 어떤 것이냐면 예수님을 따르긴 합니다. 그러나 병고침의 기적, 오병이어 기적과 같이 육신적인 것에 초점을 둔 사람들입니다.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한 것입니다. 로마 압제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키는 해방자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힘없이 로마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이때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자 ‘자기 자신을 먼저 구원하라’고 조롱합니다. 그게 무리입니다. 무리란 예수님을 따르긴 하면서도 자기 유익에 따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죄 사함 받고 영생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적도, 치유도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가장 큰 기쁨은 바로 거기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인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강림절입니다. 강림절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번 강림절을 보내면서 우리 신앙이 다시 정립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강림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리가 아니라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 이 세상 만민을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주로 오셨습니다. 시므온이 만난 예수, 시므온이 고백한 예수님은, 둘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므온이 기다린 예수, 그가 만난 예수님은 빛 되신 분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님은 참 빛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둠에 빛이 비친 사건,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이요, 성탄의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이 빛입니다. 빛 가운데 창조된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세상에 어둠이 왔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떠났을 때부터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자 사람들의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사람들이 죄로 인해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온 세상은 죄와 사망이 주관하게 된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신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삶의 진정한 행복, 진정한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발견하기까지는 자기 가치, 자기 존재, 자기 행복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둠의 세상에 참 빛으로 오셨습니다.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어디나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비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자기 가치를 발견하고,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수 그리스도 복음 때문에 제대로 살게 된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여러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여성을 존중하게 되었고, 고아원을 세워 교육과 양육을 함께 했으며, 문맹 퇴치 운동을 하여 문맹에 어둠을 쫓아냈고, 금주·금연 운동을 벌여서 건강관리에 공헌했으며, 양반 상놈이라고 하는 인간 차별 문화를 평등문화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때문에 우리나라는 광명한 빛 가운데로 나온 민족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모든 삶에 빛이 되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저와 여러분은 두 가지 반응을 해야 합니다. 하나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빛을 받아들여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까지 어둠에 속한 사람이 있다면, 혹시 자신의 마음이 어둡고, 방황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 빛을 체험한 사람들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빛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빛을 체험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모세는 이 빛을 체험했습니다. 가시 떨기나무에 붙은 불꽃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또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면서 이 빛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올 때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얼굴에도 이 빛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변화산에서는 예수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고 말씀합니다. 스데반은 순교 당하기 전 하늘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 보좌와 그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그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빛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강력한 하나님의 빛을 체험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는 삼일동안 눈을 뜰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얼굴은 어떻습니까? 요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너무 어둡습니다. 세상 죄로 찌든 얼굴, 분노하는 얼굴, 근심과 염려, 시기와 질투의 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얼굴에 빛이 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빛을 체험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쳐져야 합니다. 우리 어두운 얼굴, 썩은 마음, 분노하는 마음, 상처받은 마음이 이 빛으로 치료되고 회복되고 기쁨이 솟아오르는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성탄절은 빛이 비친 날이요, 그 빛이 우리에게 임한 날입니다. 두 번째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 들어온 사람은 그 빛을 이웃에게, 온 세상에 나누어야 합니다. 본문 31절로 32절에 보면,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 그렇습니다. 복음의 빛은 모든 족속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 빛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추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의가 바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이 비춰지면 어둠은 반드시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성탄절이 되면 사람들은 온통 빛으로 장식합니다. 크리스마스 트리, 촛불...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역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빛이 되어야 합니다. 어둠이 되면 안 됩니다. 내 가정에서 내가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학원에서 일터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있음으로 해서 세상이 밝아지고, 내가 있음으로 해서 교회가 밝아져야 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이 성탄절에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음의 어둠도 떠나가고, 삶의 어둠도 떠나가고 광명한 빛 가운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빛이 되어 어둔 세상을 밝히는 포도원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므온이 만난 예수, 시므온이 고백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셋째, 인생의 주관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주관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인생의 패함과 흥함을 주관하시는 분,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본문 34절에 보면, 시므온이 마리아와 요셉을 축복하고 말하기를,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패하게도 하시고, 흥하게도 하시고...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삶에 대한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중심한 삶의 태도요 다른 하나는 자기를 중심한 삶의 태도입니다. 똑같이 주어진 삶이지만 삶에 대한 자세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사람은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이 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에게 주어진 모든 것... 물질, 자식,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셨다고 하는 분명한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권신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주권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을 보세요.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왜입니까? 다윗이 전쟁에 나가 사울보다 훌륭한 공적을 올립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이에 사울이 시기하고 질투한 것입니다. 이 시기심 속에 사탄이 틈타기 시작하면서 사울은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았다면, 오히려 다윗을 칭찬하고 축복하며 자신의 든든한 군대장으로 세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번성한 나라를 만들어가는 지혜로운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주권을 알지 못할 때 이렇게 교만에 빠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 주권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주권을 알면 겸손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이 세상 주관자 되심을 알 때, 이것을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내 욕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욥을 보세요. 욥은 잘 아는 대로 동방의 의인이요 부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런데 이런 욥이 한 순간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집과 재산, 그리고 열 명 자녀를 순간에 다 잃은 것입니다. 그리고 몸에는 악창이 나서 재 가운데서 질그릇 조각으로 긁고 있습니다. 그런 그를 그의 아내가 와서 저주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도 받지 않겠느냐며 입으로 범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백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 주권을 믿을 때 우리는 결코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했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고, 실패했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초라해지지 않고, 어떤 고난이 닥쳐온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기적이 없어도 주권신앙만 분명하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주권을 인정하고 믿는 믿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더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하나님 지혜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은혜와 평안 속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강림절 신앙은 바로 하나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 주관자가 되시고, 세상 주관자가 되시고... 이것을 믿는 것이 강림절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므온이 만난 예수, 시므온이 기다린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인생의 주관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도 예수님 주권신앙을 분명히 하시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나다나엘 호손 작품 중에 ‘큰 바위 얼굴’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어느 마을 앞산 바위 위에 인자한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그 얼굴과 똑 같은 사람이 나와서 그 마을에 화평과 행복을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마을 어린 소년 하나는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와 같이 생긴 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 그 소년이 노인이 되었을 때 그의 얼굴이 큰 바위 얼굴과 같은 모습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면서 큰 바위 얼굴을 닮아간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 됨됨이가 형성되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에게는 주님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구원의 주님, 빛 되신 주님, 인생의 주관자가 되시는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아무쪼록 유대인들처럼 정치적 메시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신앙관을 정립하고 믿음이 더 성장하고 삶이 풍성해지는 강림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성탄절 한 주 남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고, 빛의 사명을 감당하셔서 여러분이 있는 곳마다 어둠이 물러가게 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 주권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믿는 자의 능력을 보여주는 강림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누가복음 2 : 8-14) 12.01.25 다음글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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