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요나서 1 : 4-6)
김은미 댓글 0건 조회 7,099회 작성일 2012-01-25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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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1.주일낮예배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요나서 1 : 4-6

어떤 사람이 설교시간에 정신없이 졸고 있었습니다. 아주 상습적으로 조는 사람입니다. 목사님은 창피를 주면 다시는 졸지 않겠지... 생각하고는 갑자기 질문을 했습니다. “여기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다 일어나 보세요”

그러자 교인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 집사님은 타이밍을 놓치고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놀래서 잠에서 깨보니 자기만 앉아 있고 모두 서 있는 겁니다. 옆 사람에게 물어보고는 얼굴이 벌개져 집에 돌아오고 말았답니다.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오늘만은 절대 졸지 않아야지... 하지만 그 날도 여전히 졸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이번에는 “지옥가고 싶은 사람은 다 일어나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또 졸다가 앞부분은 못 듣고 ‘일어나 보세요’ 하는 말만 들은 겁니다. ‘오늘은 망신당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킥킥대며 웃자 ‘뭔가 잘못됐구나!’ 아차 싶은 겁니다. 하지만 다시 앉을 수도 없고...

그래서 “내가 왜 서 있는지 모르지만, 목사님과 저만 서 있네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풍자적인 말씀이지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많습니다.

다윗은 잠 때문에 불명예 오점을 남긴 사람입니다. 신하들은 피를 흘리며 전쟁터에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낮잠을 즐기다가 무서운 유혹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말씀에 감격합니다. ‘저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지’ ‘저 말씀이 능력이다’ ‘저 말씀이 내게 구원을 주실 거다’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그 시간에 유두고는 창틀에 걸터앉아 졸고 있습니다. 결국 창틀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안수로 다시 살았지만, 성경에 졸다가 죽은 사람으로 기록되고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등불에 기름은 준비하지 않고, 졸며 자다가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실 인생에서 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장수하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대부분 잠을 잘 자는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심신이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육신이 건강하지 못하면 잠을 잘 자지 못합니다. 정신적으로 걱정과 스트레스가 많아도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불면증은 아주 큰 병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면증에 시달리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볼 때 잠을 잘 자는 것이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127편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잠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잠 잘 자는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적인 잠입니다. 영혼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의 잠은 위험한 것이요, 저주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곡식을 뿌렸는데 나중에 보니까 가라지가 자라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알아보니, 잠을 잘 때 사탄이 와서 가라지를 뿌렸다고 했습니다. 잠을 잘 때, 당장은 문제가 없는 것 같아도 사탄이 뭔가를 뿌려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잠을 자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잠 때문에 망신당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요나입니다. 요나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배 위에서는 풍랑으로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배 밑층에서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때 선장이 그에게 찾아가 말합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 네 하나님께 구하라”, 왜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자를 향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당신 하나님을 찾으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것이 영적인 잠을 자는 자에게 오는 모습입니다. 이는 마치 오늘 세상이 성도를 향해 ‘정신을 차리라’ 고 경고하는 외침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인 것입니다.

오늘은 강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잠자는 자들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뭡니까?

첫째, 사명의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사명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사람은 학식, 재물, 능력에 상관없이 모두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일, 사명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불행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사명을 모르고,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각자 위치에서 맡겨진 일에 충실할 때 행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나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싫어서 자기 위치를 떠난 사람입니다. 요나 사명이 뭡니까? 요나는 하나님께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외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 이제 곧 하나님 심판이 임할 것이다... 그러니 회개하라고 전하는 것이 요나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사명을 거부합니다. 왜냐면 니느웨는 앗수르 수도입니다. 당시 유대는 앗수르 위협 아래 있었습니다. 따라서 철저한 민족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요나는 니느웨 멸망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 반대편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배가 출발하고 이제 모든 것이 다 되었다고 생각되자, 배 밑으로 내려가 편안하게 잠을 잡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이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놓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큰 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선원들은 대풍이 일자 각자 자신의 신을 향해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모든 물건을 바다에 던집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요나는 배 밑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때 선장이 소리친 것입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여러분, 이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불신자가 선지자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요나는 깜짝 놀랐을 겁니다. ‘왜 네 사명을 잃어버렸느냐?’ 이런 외침으로 들렸을 겁니다.

여러분, 얼마나 부끄럽고 초라한 일입니까? 우리가 사명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불쌍하고 초라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삼손을 보세요. 하나님은 삼손에게 나라를 살리라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긴 머리에 힘을 주셨습니다. 성령이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품에 잠들어 있다가 두 눈이 빠지고 멸망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명을 잃어버리니까 이처럼 초라하고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자는 제대로 분명하게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성도는 세상의 빛입니다. 빛이 있을 때 어둠은 물러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빛이 제대로 제 몫을 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회는 어둡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도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은 세상이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그런데 만일 소금이 제 맛을 잃어버리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성도는, 교회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위로와 희망을 주고, 삶에 의욕과 활기를 주고, 영적인 충전소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시달린 사람들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늘의 음성을 들으며, 천국의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는 곳, 참 소망과 유익을 주는 곳이 교회가 되고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끝내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 속에 들어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예수 이름으로 위로와 소망을 주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때문에, 그리고 우리 교회 때문에 저들의 영혼이 살고 인생의 참 길을 발견하고 소망을 얻는 역사가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사명의 잠에서 일어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니느웨 한 가운데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것입니다. 그것이 3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악한 도성 니느웨 사람들이 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왕도 회개합니다. 심지어는 짐승들도 회개하라고 명령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 계획을 철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사용하셔서 니느웨 성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면 이처럼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가 그리고 여러분이 사명의 잠에서 깨어나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넉넉하게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기도의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 역사는 기도하는 사람의 역사다” 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기독교 역사를 끌고 갔고, 또 기도하는 사람만이 역사를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복음을 전했고, 기도하는 사람이 축복받아 하나님께 헌신했고, 기도하는 사람이 사명받아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기도의 잠을 깊이 자고 있습니다. 요나가 누구입니까?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즉 풍랑이 덮쳐올 때 요나는 먼저 기도했어야 합니다. 다른 사공들은 각자 자기들 신 앞에서 응답도 없는 기도를 하며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신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가 잠만 자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잠들면 기도문도 막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잠자는 자는 반드시 시험에 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십니다. 그때 잠자던 베드로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할 때 첫 번째 과제가 여리고성 공략이었습니다. 철옹성 여리고, 물리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나름대로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받은 내용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뭐든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도움을 요청했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매일 여리고성을 한 바퀴씩 돌아라.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 돌아라. 그리고 내가 신호를 할 때 다 같이 소리를 질러 외쳐라!” 그래서 간단하고 완전하게 여리고성을 함락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신비한 은혜입니까?

그 다음 만난 것이 규모가 아주 작은 아이성입니다. 그런데 아이성을 공략할 때는 참패를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 말씀 전후를 아무리 뒤져봐도 기도했다는 흔적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해이해진 것입니다. 큰 것을 이겼다고, 작은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겁니다.

때로는 기도를 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기도를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때 사탄이 장난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리품에 대해서는 무조건 죽이고 무조건 태우고 아무 것도 손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탐심의 악령이 아간을 미혹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옷 한 벌과 은 이천 세겔과 큰 금덩어리 하나를 몰래 훔쳐와 자기 장막에 파묻었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한 일입니다. 결국 이 일이 화가 되어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인생의 고난, 가정의 시련, 사회 위기...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 가정, 이 나라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 한 빈민촌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사는 ‘조지 이스트만’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들 모자는 그 날 벌어 그 날 먹고 사는 어려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조지 어머니는 아들이 잠들기 전, 그의 손을 꼭 잡고 기도하기를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지금은 비록 가난하지만 조지가 훌륭히 자라 이 나라 큰 일꾼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그러면 조지는 깊은 밤에 일어나 다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 어머니 기도가 헛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래서 아들이 잠들기 전에는 어머니가 기도하고, 어머니가 잠이 들면 아들이 기도하고... 어머니와 아들이 이렇게 번갈아 가며 기도를 했습니다.

조지는 커서 사진관에 취직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열심히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조그만 가게를 열어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간편한 휴대용 카메라와 필름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국내는 물론 세계 여기저기서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세계 각처에 공장을 세우고 사업은 날로 번창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코닥 그룹 회장 이스트만입니다. 어머니와 아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세계적인 기업 회장이 되었고, 자기 재산 절반을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만은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잠을 자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문제를 만납니다. 그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런데 성도는 기도로 문제를 풀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특징이요 특권인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기도 없는 영은 그리스도가 없는 영’이라고 했고,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으면 심령이 약해져, 작은 시험 앞에서도 쉽게 넘어지고 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손해보고, 내 영혼이 손해보고, 내 자녀들이 손해를 입으며, 내 가정과 교회도 손해를 보고, 나라도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기도를 쉬고 있었다면 일어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졸고 있는 자리, 영적으로 잠든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능력이며, 열쇠이며, 해답입니다.

셋째, 믿음의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9절에 보면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뭡니까? 믿음은 순종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네 번에 걸쳐 뒤로 물러갔습니다.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니느웨는 결코 용서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바로 내려갔고, 다시스로 내려갔고, 배 밑층으로 내려갔고, 네 번째는 2장 6절 말씀대로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의로 내려갔지만 나중에는 원하지 않는 고통과 어려움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내 생각을 따를 때 믿음은 자연히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가 자기 생각에 지배당하자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선지자로서 위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초라한 자가 되고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합니까?

여러분, 믿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믿음’ 과 ‘인간 중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믿음은 주님 말씀과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중심의 믿음은 개인의 생각, 경험, 이성, 감정, 현상 중심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중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그 고통 너머에 하나님께서 선한 것으로 예비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비전이 있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2007년 7월 일본 도쿄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세례 소식은 큰 화제가 됐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이 영성의 세계로 넘어왔기 때문입니다.

그가 영성의 세계를 노크한 것은 미국에 사는 딸을 통해서였습니다. 변호사인 딸이 암으로 고통 받으며, 시력 장애로 실명 직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 모든 고통을 치유받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과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딸을 문병 갔을 때, 하와이 작은 교회에서 ‘하나님, 사랑하는 딸에게서 빛을 거두지 않으신다면 남은 삶을 주님 자녀로 살겠나이다’ 고백했고 마침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치유 기적 때문에 견고한 지성의 갑옷을 벗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랑하는 딸의 경험을 통해 절대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야말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자라는 사실을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기적 때문에 믿는다면 기적 때문에 배교해야 하는 일도 생깁니다. 이어령 장관이 세례 받은 지 3주 후, 미국명문 버클리대를 졸업한 손자가 돌연히 죽었습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고 상처가 되었겠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신 건가? 의심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깊은 슬픔 속에서도 그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영성의 세계로 들어오면서 그가 간절히 원한 것은 하나님 기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이 흔들리고 변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바른 믿음생활을 하기 원한다면, 하나님, 바로 그 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원하신 그 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믿음도 영원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잠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내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뭐든지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이 믿음만 회복되면 어떤 환경, 어떤 처지 속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칼국수 장사를 하시는 어느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이 분은 영적으로 두 번 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술을 팔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목사님의 설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두 번 영적인 위기를 잘 감당해서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목사님 설교에 무슨 시험이 들었느냐 했더니, 한번은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수입 밀가루에는 방부제가 많아서 먹으면 인체에 독이 된다”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교인들은 칼국수 장사 하시는 집사님이 걱정이 되어 “집사님, 힘내세요” 하며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내외는 목사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수입 밀가루를 안 쓰고 비싸지만 국산 밀가루로 칼국수 장사를 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내 경험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 내외는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통해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렇게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부터 좋은 먹거리로 내 식구를 먹인다는 마음을 갖고 장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웰빙 바람이 불면서 이 집을 TV, 신문에서 찾아와 촬영해가기 시작합니다. TV에도 나오고 신문에도 기사가 실리니까 자연히 홍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집 칼국수를 먹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은 자기감정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나가 믿음의 잠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말씀에 순종해서 니느웨 성을 돌며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그때 요나 자신뿐만 아니라 니느웨 백성들, 니느웨 도성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잠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가운데 처하든지 승리하며 하나님의 기적을 보는 포도원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2003년, 우리나라 남극기지인 세종기지에서 조난사고가 있었습니다. 고무보트가 전복되어 연구원들이 물에 빠진 것입니다. 간신히 헤엄쳐 나왔지만 사방이 얼음 투성이였습니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텨야 되는데, 잠이 쏟아집니다.

여러분, 이때 잠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잠들면 동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대로 잠들면 우리는 죽는다’, 그래서 얼음으로 얼굴을 비벼대며 잠을 쫓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잠이 오니까 나중에는 서로 뺨을 때리며 잠을 쫓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잠이 들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소멸되고 모든 삶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은혜가 넘치고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고난이 오더라도 넉넉히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악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사명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 교회의 사명, 사회적인 사명, 빛의 사명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깨어 세상에 소망을 주어야 하고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아무 것도 우리를 도울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만 내 인생과 가정, 나라와 민족의 살 길이 열리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믿음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어떤 환경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강림절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사명의 잠, 기도의 잠, 믿음의 잠에서 깨어 주님을 기다리며, 여러분의 신앙도 성숙해지는 은혜가 있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도 살고, 내 가정을 살리고, 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축복의 역사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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