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06. 주일낮예배 "정죄가 아닌 사랑으로"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724회 작성일 2011-12-09 23:04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2011.3.6.주일낮예배 정죄가 아닌 사랑으로 요한복음 8 : 1-11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본문은 성전을 배경으로 한 내용입니다.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경험되고 축복을 누리는 곳입니다. 여러분, 성전에 나올 때마다 예배의 감격과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성전에 나올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그곳에 한 여인이 잡혀 왔고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음행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성전에는 몇 종류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① 먼저 죄를 지은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지은 죄로 잡혀왔습니다. 그래서 종교 이름으로 심판을 받고 죽음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죄 값으로 죽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지금도 중동지역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 합니다. 작년에 이라크 여대생이 미국 사람과 데이트를 했다고 아버지가 딸을 죽였다고 합니다. 이라크와 미국이 전쟁을 하는 원수지간이라고 하지만, 친 딸을 죽일 정도입니다. ② 종교지도자들입니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종교적, 사회적으로 저명한 귀족계급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윤리주의자들이었고, 지식의 탁월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는데 그들의 윤리와 지식을 사용했습니다. 여러분, 성전은 하나님과 내가 만나는 곳입니다. 나의 죄가 거룩하며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의롭고 다른 사람이 틀리다고 판단하는 것은 본문의 종교지도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습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③ 은혜로우신 예수님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모세 율법 대로라면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여야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고 물었습니다. 이유는 간음한 여인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사실 이 여인을 처형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동의를 얻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들키면 여자뿐 아니라 남자까지도 돌로 쳐 죽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은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리기 위한 음모였습니다. 만약에 그녀를 살려라, 용서해주라고 말씀한다면,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으로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을 율법대로 죽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지금까지 가르친 사랑과 용서의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당시는 로마 제국이 유대 땅을 다스렸습니다. 로마법으로 유대인인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죽이라고 말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시면 로마법을 지키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땅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쓰십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한 사람 두 사람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무섭게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예수님과 이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요, 복음 중에 복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건 속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죽이는 분이 아니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붙잡혀 왔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다 흥분을 합니다. ‘저런 여자는 죽여야 된다’, ‘말세다’, 모두들 야단이었습니다. 여자의 얼굴엔 공포와 체념이 몰려들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얼굴엔 살기가 돌았습니다. 그들은 이 여인을 가운데 세워놓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 율법엔 돌로 치라 명령했는데 선생님은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때 주님이 엎드려 뭔가를 쓰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여러분,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 ‘죄 없는 자’ 란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만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이는 단지 ‘범죄하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죄를 지을 욕망까지도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죄인 아닌 자가 누구며 너희 가운데 이 여자보다 나은 자가 어디 있느냐? 이런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여인은 죄가 드러났고, 다른 사람들은 죄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 모두가 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여인을 죽이려고 예수님 앞에 끌고 온 것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말했지만 정의나 진리, 생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법이 있다면 죄인을 죽이는 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종교 이름으로 범죄한 여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여인을 살리는 결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여인을 죽이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위해 벌써부터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살기를 원하는 자는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분 앞에 억지로라도 끌려와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그 어떤 죄인도 사죄의 은총을 입고, 구원받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운명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폴란드 작가로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솅키에비치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가 <쿠오 바디스>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후 60년 경 로마 네로 황제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알려줍니다. 둘째는 이런 박해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킨 초대교회 성도들의 순교적 신앙상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 나타난 주인공은 비니키우스라는 장군입니다. 그는 해외 원정을 해서 많은 땅을 점령하고 적을 물리치고 개선장군으로 로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승리자입니다. 그의 머리에도 황제가 내려준 월계관이 씌워져 있습니다. 그는 젊고 용모가 빼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누가 비니키우스 아내가 될까?’ 로마 상류사회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정말 첫눈에 반해서 프로포즈한 사람은 상류사회 여성이 아니고 리디아라는 평범한 여인입니다. 리디아를 흠모하면서 리디아에게 결혼할 것을 청혼합니다. 그러나 리디아는 아주 냉담합니다.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비니키우스는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에 어떤 손상을 느꼈습니다. 엘리트이고 황제 월계관을 쓰고 있는 최고 장성이고, 용모도 빼어난 사람이고, 부자이고, 귀족이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인 이 사람 프로포즈를 거절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는 자존심에 손상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리디아가 어떤 여자이기에 나를 거부하는가 하고 알아보니, 그녀는 크리스찬이었습니다. ‘도대체 리디아가 믿고 있는 예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로마 대표적인 젊은이 엘리트를 거부하는가?’ 생각하고 리디아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예수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터득하다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에게 끌려들었습니다. 예수 마음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고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자기 자신의 초라함을 느낍니다. 자기가 쓰고 있는 월계관이 누추하게 보입니다. 자기가 듣고 있는 개선장군, 귀족, 원로원의 회원이라는 말이 다 헌신짝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싸워 이겼을 때 승리의 면류관이 씌워졌는데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히려 더 싸워 이겨야 되겠다는 분발력만 생겼습니다. 비니키우스 마음속에는 새로운 평화가 생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가 생깁니다. 그래서 비니키우스는 머리에 쓰고 있던 월계관도 내던지고, 장성 계급장도 내던지고, 귀족 칭호도 버리고, 평범하고 서민적인 기독교 교인들이 모인 공동체 속에 들어가서 섬기는 생활을 시작합니다. 남들이 보면 누추한 자리로 내려앉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월계관도 없고 귀족 칭호도 없어졌지만 그 마음속에 뭔가 새롭게 생긴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천국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천국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곧 천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한 순간이고 허무한 것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이제는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천국생활이라는 것을 깨우쳤습니다. 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고 보니까, 새로워지고 보니까, 변화를 받고 보니까 가치관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진실로 회개한 사람, 진실로 거듭난 사람, 진실로 새로워진 그 사람이 기독교를 세계 종교로 점령하게 만들었다” 비니키우스가 예수 잘 믿는 사람, 리디아를 만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그의 삶이 새로운 삶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강도 만난 자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한 여행객이 여행하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다 빼앗기고 매를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때 제사장 한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걸음을 재촉하여 그곳을 빠져나갔습니다. 혹시 강도들이 자기에게도 쫒아올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레위인이 길을 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역시 도망가듯 빠져나갔습니다. 혹시 자기도 화를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이 죽게 된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비를 다 주고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 보기를 짐승 보듯이 부정한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우월감을 가지고 살던 유대인이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2011.03.13. 주일낮예배 "사순절의 영성" 11.12.09 다음글2011.02.20. 주일낮예배 "은총을 받은 자여" (졸업)11.12.09